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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세 한국어의 대외 언어 접촉과 내부 음운 변모에 관한 통합적 고찰 본문

어학

고대·중세 한국어의 대외 언어 접촉과 내부 음운 변모에 관한 통합적 고찰

EyesWideShut 2026. 6. 22. 15:36

[학술 연구 논문]
고대·중세 한국어의 대외 언어 접촉과 내부 음운 변모에 관한 통합적 고찰
: 몽골어 차용, 소실 문자의 도태 경로, 한·일 한자음 입성(入聲) 대응 및 《동국정운》의 음운 기획을 중심으로

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는 고대 국어에서 후기 중세 국어에 이르기까지 한국어가 겪은 외래 언어와의 접촉 양상과 그에 따른 내부 음운 체계의 변모 과정을 입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3-14세기 여몽간섭기에 유입된 몽골어 어휘들은 지배층의 언어생활을 혁신하며 한국어 역사상 최초로 지배국가의 언어가 직접 정착한 가시적 사례를 보여준다. 비록 몽골어 접촉이 한국어 고유의 음운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지는 못했으나, 이 시기 발생한 대규모 사회 변동은 후기 중세 국어로의 이행을 가속하는 촉매가 되었다. 한편, 훈민정음 창제 전후로 관찰되는 순경음 비읍(ㅸ), 반치음(ㅿ), 아래아(ㆍ)의 소멸은 언어 내부의 구조적 균형과 조음 경제성에 따른 자생적 음운 변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생적 변화는 고대 한국어 시기 중국 중고음(中古音) 입성(入聲) 종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관찰된다. 한국어는 혀끝 폐쇄음 [-t]를 자국의 유음화 규칙에 따라 'ㄹ' 종성으로 고착시킨 반면, 개음절 구조를 지닌 일본어는 모음 삽입을 통해 이를 파찰음화([-tsu], [-chi])하는 대조적 경로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단행한 《동국정운》 체제와 명나라 《홍무정운》의 수용은, 현실의 변모된 'ㄹ' 종성을 '이영보래(以影補來)'를 통해 정통 입성으로 환원하려 한 인위적이고도 고도의 언어학적 기획이었음을 증명한다. 본고는 일련의 논의를 통해 한국어사의 역동성이 내부적 조음 규칙과 외부적 언어 기획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주제어: 여몽간섭기, 몽골풍, 소실 문자, 입성(入聲), 유음화, 동국정운, 이영보래, 홍무정운

I. 서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한국어사의 전개 과정은 고립적인 내부 진화의 역사라기보다는,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접촉 및 그에 대한 주체적 수용·변형의 역사이다. 특히 중세 국어 시기는 내외 유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어 구조 전반에 지대한 격변이 일어난 시기이다. 대외적으로는 13세기 여몽전쟁과 이어진 원 간섭기라는 초유의 정치적 지배 체제를 경험하였고, 대내적으로는 15세기 훈민정음 창제를 전후하여 고유 음운 체계의 대대적인 정비와 도태가 진행되었다.
기존의 국어학 연구는 어휘사와 음운사를 다소 분절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즉, 몽골어 차용어는 상층 지배문화의 단편적 수용으로, 소실 문자의 추이는 중세 국어 내부의 고유한 음성 변화로, 그리고 한자음의 형성은 한문화권 유입의 결과로 각각 독립되어 논의되곤 했다. 그러나 언어의 변화는 어휘적 자극과 음운적 제약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다. 외래 어휘가 유입될 때 자국의 음운 규칙에 맞게 굴절되는 현상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한자음을 정비하기 위해 인위적인 표기 체계를 고안하는 행위는 모두 당대 한국어의 음운론적 기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9세기 신라 말기부터 15세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기를 중심축으로 삼아 외래 언어(몽골어, 중국 한자음)의 접촉이 초래한 음운론적 파장과 한국어 고유 문자의 소멸 경로를 통합적으로 재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어가 외래 요소를 어떻게 자국의 자원(예: 'ㄹ' 종성)으로 소화해 냈으며, 세종대의 어문학적 기획이 지닌 학술적 비밀이 무엇이었는지 규명하는 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
2. 연구 범위 및 방법
본고의 논의 범위는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획정된다. 제2장에서는 여몽간섭기 유입된 몽골어 어휘의 양상과 그것이 한국어 음운 체계에 미친 간접적 영향 및 국어사적 시기 구분의 의의를 분석한다. 제3장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존재했던 대표적 소실 문자인 순경음 비읍(ㅸ), 반치음(ㅿ), 아래아(ㆍ)의 음가와 단계적 소멸 과정을 추적한다. 제4장에서는 중국 중고음 입성 삼형제([-p], [-t], [-k])가 한국과 일본으로 유입될 때 발생한 음운론적 분기점을 비교 분석하되, 유독 [-t]만이 한국어에서 'ㄹ'로 유음화된 메커니즘을 조음 위치학적으로 규명한다. 제5장에서는 세종대가 감행한 《동국정운》식 표기의 실체와 미스터리를 '이영보래(以影補來)'와 '초·중·종성 체계의 삼분법 강박'을 중심으로 파헤치고, 명나라 《홍무정운》과의 이론적 친연성을 논한다.
연구 방법론으로는 중세 국어 문헌 자료(《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의 표기 용례를 비교 분석하는 문헌학적 방법과, 현대 언어학의 조음음성학(Articulatory Phonetics) 및 음운 규칙 분석을 병행한다.

II. 여몽간섭기 몽골어 어휘 유입과 언어·사회적 파장
1. 지배층 중심의 '몽골풍'과 어휘 차용의 역사적 의의
1231년 몽골의 제1차 침공으로 시작된 여몽전쟁은 고종의 강화도 천도와 30여 년에 걸친 치열한 항전을 겪은 후, 1270년 개경 환도와 함께 원나라의 내정 간섭기로 접어들었다. 이후 약 80년간 지속된 원 간섭기는 고려 왕실이 원 황실의 사위국(부마국)으로 편입되는 고도의 정치적 결속을 낳았다. 이러한 정치·지정학적 환경은 지배층을 중심으로 몽골의 복식, 두발, 음식, 제도 등을 숭상하는 '몽골풍(蒙古風)'의 대유행을 촉발했다.
언어학적으로 이 시기는 한국어 역사상 외래 지배국가의 언어가 우리말 체계 내부로 직접 유입되어 정착한 최초의 대규모 어휘 차용 사례로 기록된다. 이전의 한자어 유입이 문자를 통한 문화적·학술적 수용이었다면, 몽골어의 유입은 구어(口語)적 접촉과 권력 관계에 기반한 직접 침투였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유입된 어휘들은 왕실 용어, 직업 접미사, 군사 및 매사냥 용어, 가축(목마) 관련 전문 어휘 등 다방면에 걸쳐 분포하며, 그 중 상당수는 700년이 지난 현대 한국어에까지 강력한 화석으로 남아있다.
2. 영역별 몽골어 차용어의 실제와 음운론적 수용
(1) 왕실 및 궁중 중심의 상층 용어
원나라 공주들이 고려 국왕과 혼인하여 개경 궁궐로 입궁하면서 궁중 내부의 생활 용어가 급격히 몽골화되었다. 대표적인 단어가 임금의 밥상을 뜻하는 '수라(水剌)'이다. 이는 몽골어로 국물 혹은 음식을 의미하는 '술라(šula)'가 유래로, 고려 왕실의 최고급 식생활 용어를 대체하였다.
또한, 현대어에서 아내를 비속하게 혹은 친근하게 부르는 '마누라'는 당대에는 세자빈이나 상궁 등 왕실의 최고위 여성을 지칭하던 극존칭 호칭이었다. 이는 몽골어에서 지체 높은 존재를 뜻하는 '마하누라' 계열의 단어에서 결부된 것으로 추정된다. 궁중의 하급 시종을 뜻하는 '무수리' 역시 몽골어로 당나귀를 모는 사람이나 시종을 뜻하는 어원에서 유래하여, 고려 궁궐 내 고용 구조와 언어의 결합을 보여준다.
(2) 인적 속성 접미사 '-치(赤)'의 정착
몽골어에서 특정한 직업이나 기능을 전담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접미사 '-či'는 중세 국어에 유입되어 강력한 생산성을 획득했다. 고려 시대 관료를 뜻하는 '벼슬아치', 상인을 낮잡아 부르는 '장사치', 환관을 뜻하던 '고자치' 등이 모두 이 접미사가 고유어 혹은 한자어 어근과 결합하여 형성된 단어들이다.
이 접미사의 생명력은 현대 국어에까지 이어져, 부랑자를 뜻하는 '양아치'나 음정을 잡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음치(音癡)' 등의 단어 형성 기저에도 고대 몽골어 접미사 '-치'의 기능적 흔적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군사·매사냥 및 가축 관련 특수 어휘
세계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의 군사력과 유목 문화는 가축 및 수렵 용어의 유입을 주도했다. 특히 고려 지배층이 열광했던 매사냥 관련 용어에서 몽골어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옅은 갈색 매를 뜻하는 '보라매'의 '보라'는 몽골어로 보라색(당시 기준 옅은 갈색)을 뜻하는 단어이며, '송골매'의 '송골'은 매를 뜻하는 몽골어 '숑호르(šongxor)'에서 유래했다.
또한, 몽골이 탐라(제주도)에 직할 목마장인 수산평 목장을 두면서 말의 털 색깔을 구분하는 전문 어휘들이 대거 제주 방언과 중앙어에 진입했다. 검은 말을 뜻하는 '가라말'의 '가라(gara)'는 몽골어로 검은색을 의미한다. 국가 통신 체계였던 역참(驛站)의 '참(站)' 역시 몽골어 '잠(jam)'의 차용으로, 이는 현대어 '정거장(停車場)'의 '장'이나 '한참'이라는 시간적 거리를 나타내는 어휘로 분화 발전했다.
3. 음운론적 간섭의 한계와 구조적 보수성
이처럼 막대한 어휘적 침투에도 불구하고, 몽골어와의 접촉이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 체계라는 '음운론적 기저 구조'를 직접적으로 개조하지는 못했다는 점은 언어학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소리 체계는 언어 구조의 최하층에 위치하여 외래 요소에 대해 강한 보수성과 저항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몽골어 어휘들은 한국어에 들어올 때 고유의 음운 구조로 수용되지 못하고, 당시 고려어의 음운 제약(Phonotactic Constraints)에 맞게 강제로 변형·굴절되었다.
  • 두음법칙의 투영: 몽골어는 설측음 및 유음 'ㄹ[r/l]'이 단어 첫머리에 오는 것이 자유로웠으나, 당대 고려어는 이를 기피했다. 따라서 몽골어의 '라(la, 밀랍)' 같은 단어는 앞에 고유어 '밀'을 덧붙여 '밀랍'이라는 복합 구조로 순화하여 수용했다.
  • 자음 동화 및 음절 구조화: 몽골어 '숑호르(šongxor)'의 경우, 한국어에 없는 마찰음 구조와 자음군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폐쇄음 기류에 맞추어 '송골'로 자음 동화를 일으키며 정착했다. 즉, 한국어는 외래 언어를 수용할 때 자국의 음운 규칙을 훼늄(Filtering) 장치로 삼아 원형을 변형시켰다.
4. 국어사 시기 구분에서의 간접적 유의성
비록 직접적인 음운 구조 개정은 없었으나, 여몽간섭기는 국어사적으로 '전기 중세 국어'에서 '후기 중세 국어'로 넘어가는 중대한 분수령을 형성한다. 30여 년간의 전란과 강화도 천도, 이어진 개경 환도와 대규모 인구 이동(공녀, 군인, 역관 등의 이동)은 기존의 완고했던 중앙 귀족 중심의 언어적 보수성을 완전히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방 방언의 중앙 유입과 계층 간 언어 융합은 고대 국어의 잔재를 지니고 있던 전기 중세 국어의 음운 체계(예: 초기 성조 체계의 요동, 복잡한 격표지의 단순화)를 뒤흔들었다. 따라서 몽골의 지배 시기는 국어 내부의 자생적 음운 변화를 급격히 가속화한 '사회언어학적 촉매기'로 정의할 수 있다.

III. 중세 국어 소실 문자의 음운론적 도태 과정
훈민정음 창제 당시(15세기)에는 뚜렷한 음가와 기능을 가지고 존재했으나, 이후 한국어의 소리 변화에 따라 점차 생명력을 잃고 사라진 문자들의 도태 경로는 한국어 음운사의 핵심적인 자생적 진화 과정을 대변한다. 여기서는 순경음 비읍(ㅸ), 반치음(ㅿ), 아래아(ㆍ)의 소멸 기전을 시기별로 고찰한다.
1. 순경음 비읍(ㅸ)의 급격한 소멸과 반모음화 (15세기 중반)
(1) 음가와 발생 조건
'입술가벼운소리'로 명명된 'ㅸ'은 현대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성 양순 마찰음 [β](영어의 [v]와 유사하나 윗이빨을 쓰지 않고 두 입술 사이를 마찰시키는 소리)로 재구된다. 이 소리는 본래 고유어 내부에서 울림소리(모음, 혹은 유음)와 울림소리 사이에서 폐쇄음 'ㅂ'이 약화(Lenition)되면서 발생한 조건 이음(Allophone)이었다.
(2) 도태 경로와 ㅂ 불규칙 활용의 형성
'ㅸ'은 1446년 훈민정음 창제 직후 서적(《용비어천가》 등)에는 선명하게 등장하지만, 불과 10여 년이 지난 1460년대(간경도감 간행 문헌)부터 급격히 자취를 감춘다. 이는 한국어 음운사에서 가장 빠르게 소멸한 사례이다.
  • 소멸 메커니즘: 유성 마찰음 [β]는 조음의 난이도가 높아, 마찰성을 잃고 원순 반모음 'ㅗ/ㅜ [w]'로 변모하였다.
  • 실제 변화 양상:
    • 15세기 초: 더ᄯᅳ다 [təβɯ-da] -> 15세기 후반: 더우다
    • 15세기 초: 고ᄫᅡ [koβa] -> 15세기 후반: 고와
  • 역사적 화석: 이 변화는 현대 국어의 'ㅂ 불규칙 활용'을 낳았다. '돕-[助]'에 모음 어미 '-아'가 결합할 때 '도와'가 되고, '춥-[冷]'에 '-어'가 결합할 때 '추워'가 되는 현상은, 과거 어간과 어미 사이에 존재했던 'ㅸ'이 [w]로 바뀐 채 고착된 음운론적 유산이다.
3. 반치음(ㅿ)의 점진적 탈락과 ㅅ 불규칙 활용 (16세기 말)
(1) 음가와 성격
'반시옷' 또는 '반치음'으로 불리는 'ㅿ'은 치조 마찰음 'ㅅ[s]'의 유성음 버전인 유성 치조 마찰음 [z](영어의 [z] 발음)로 추정된다. 이 역시 주로 울림소리 사이에서 환경적 제약을 받으며 존재했던 음소이다.
(2) 도태 경로와 소멸 시기
'ㅿ'은 순경음 비읍보다는 훨씬 긴 생명력을 유지했으나, 16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발음의 강도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1592년)을 전후한 16세기 말에 완전히 소멸했다.
  • 소멸 메커니즘: [z] 발음은 마찰성과 유성성을 동시에 상실하면서, 자음으로서의 음가 자체를 잃고 완전 탈락(Zero, ∅)하는 경로를 밟았다. 첫소리(초성)로 올 때는 소리 값이 없는 빈 기호인 'ㅇ'으로 교체되었다.
  • 실제 변화 양상:
    • 15세기: 마ᅀᆞᆷ [mazəm] -> 16세기 후반: 마음
    • 15세기: 아ᅀᆞ [azə] -> 16세기 후반: 아우
    • 15세기: 가ᅀᅡ람 [kazaram] -> 16세기 후반: 가람(강)
  • 역사적 화석: 현대 국어의 'ㅅ 불규칙 활용'의 기저가 바로 이 'ㅿ'이다. '짓-[築]'에 '-어'를 붙이면 '지어'가 되고, '잇-[連]'에 '-어'를 붙이면 '이어'가 되는 것은, 본래 '짓다/잇다'의 15세기 어간 받침이 'ㅅ'이 아닌 'ㅿ'이었기 때문에, 모음 어미 앞에서 자음이 완전히 증발해 버린 결과이다.
4. 아래아(ㆍ)의 2단계 음가 소멸과 문자 폐지의 장기성 (16세기~20세기 초)
(1) 음가적 정의
'ㆍ(아래아)'는 후설 저모음 혹은 중저모음인 [ʌ](현대 국어의 '어'보다 입을 더 크게 벌리고 혀를 뒤로 빼는 소리) 혹은 원순성을 약간 띤 [ɔ]로 재구된다. 훈민정음의 삼재(三才) 중 '천(天)'을 상징하는 핵심 모음이었으나, 음가의 소멸과 문자의 폐지가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독특한 이력을 지닌다.
(2) 2단계 음소 소멸 경로
아래아의 소멸은 단어 내부의 위치에 따라 철저히 차등적인 2단계 소멸 법칙을 따랐다.
  • 제1단계: 제2음절 이하에서의 'ㅡ'화 (16세기 후반)
    • 단어의 첫 번째 글자가 아닌, 두 번째나 세 번째 글자에 위치한 'ㆍ'는 강세를 잃고 전형적인 비원순 고모음인 'ㅡ'로 하향 수렴했다.
    • 예: 가ᅀᆞᆷ -> 가ᄋᆞᆷ -> 가슴 / 마ᅀᆞᆷ -> 마ᄋᆞᆷ -> 마음
  • 제2단계: 제1음절(어두)에서의 'ㅏ'화 (18세기 중반)
    • 단어의 첫머리에 살아남아 있던 'ㆍ'는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저모음인 'ㅏ'에 통합되며 소리(음가)의 독립성을 최종 상실했다.
    • 예: ᄒᆞ늘 [hʌnɯl] -> 하늘 / ᄃᆞ리 [tʌri] -> 다리
(3) 표기법상의 관습적 잔존과 최종 폐지
18세기 중반에 이미 'ㆍ'의 실제 발음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나(제주 방언의 고립적 잔재 제외), 문헌 표기 체계에서는 관습적·보수적 전통에 의해 계속해서 쓰였다. 단어의 어원을 밝히거나 시각적 전통을 유지하려는 한글 표기의 보수성 때문이다. 아래아가 공식적으로 한글 맞춤법에서 추방된 것은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서였다. 즉, 음가 소멸 후 무려 200년 가까이 문자로서의 형태만 영위했던 것이다.

IV. 한·일 양국의 중국 입성(入聲) 수용 체계 비교 분기
중국 중고음(中古音) 체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음절 끝이 폐쇄음으로 급격히 막히는 입성(入聲) 삼형제 [-p], [-t], [-k]의 존재이다. 고대 시기 이 입성 계열의 한자음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각각 수입될 때, 양국 언어가 지닌 음절 구조의 근본적 차이로 인해 인류 언어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대조적 변모가 발생했다.
1. 양국 언어의 음절 구조적 제약 차이
  • 한국어 (폐음절 구조 발달): 고대 한국어는 자음으로 음절을 끝맺을 수 있는 종성(받침) 체계가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따라서 자음 단위의 입성을 음절 내 받침으로 흡수할 수 있는 내부적 공간이 존재했다.
  • 일본어 (철저한 개음절 구조): 고대 일본어는 반드시 '자음+모음(CV)' 혹은 단독 '모음(V)'으로만 음절이 끝나는 개음절(Open Syllable) 구조를 고수했다. 음절 말에 홀로 남는 자음(받침)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언어적 특성 때문에, 중국의 입성 자음을 수용하려면 반드시 인위적인 모음을 첨가(Vowel Insertion)해야만 했다.
2. 입성 [-t]의 수용과 유음화(Liquidization) 메커니즘의 차이
(1) 한국어: [-t]에서 'ㄹ' 종성으로의 변모와 정착 시기
중국 중고음의 혀끝 폐쇄음 [-t](ㄷ 계열)는 한국 한자음에서 유독 'ㄹ'로 바뀌어 정착했다. (예: 月 *[wʉat] -> 월, 佛 *[but] -> 불).
  • 초기 대응 (삼국시대): 한자가 최초로 대거 유입되던 고구려·백제·신라 시대에는 중국의 [-t]를 우리말의 'ㄷ'이나 'ㅅ' 종성으로 인식해 받아들였다. 향찰과 이두에서 'ㅅ' 받침을 표기하기 위해 입성 한자인 '乙(을)'이나 '叱(질/싯)'을 대용했던 서사 습관이 이를 반증한다.
  • 변모의 결정적 시기 (9세기~11세기):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 이 'ㄷ/ㅅ' 종성은 일제히 'ㄹ'로 유음화되었다.
  • 유음화 원인(조음 위치의 일치): 폐쇄음 [-t](ㄷ)와 설측음 [-l](ㄹ)은 모두 혀끝을 윗잇몸에 대고 소리를 내는 설단음(치조음)으로 조음 위치가 완벽히 일치한다.
  • 연음 환경의 결합: 한자어 뒤에 우리말 모음 조사(예: 月 + 이 -> *워디)가 결합할 때, 고대 한국어의 강력한 규칙인 "모음 사이의 ㄷ은 ㄹ로 굴려 발음한다(유음화)"가 작동했다. [*wə-di]가 [*wə-ri]로 굴러가는 일상 구어적 빈도가 누적되자, 마침내 조사와 분리된 한자 고유의 독음 자체가 '월(月)'이라는 'ㄹ' 받침으로 역고착(Retro-fixation)된 것이다.
(2) 일본어: [-t]에서 파찰음화 [-tsu / -chi]로의 분기
일본어는 [-t] 자음을 받침으로 수용할 수 없었기에, 뒤에 모음 [u] [i]를 강제로 삽입하여 음절을 늘렸다.
  • 변모 과정: 초기에는 [tu] 또는 [ti]의 정직한 음절로 유입되었으나, 이후 일본어 내부의 구개음화 및 파찰음화(Affrication) 규칙이 적용되었다.
  • 최종 형태: [tu]는 현대 일본어의 'つ(tsu)'로, [ti] 'ち(chi)'로 안착했다.
  • 대조 예시: 중국어 *[wʉat]는 한국에서는 '월'이 되었으나, 일본에서는 모음 [u]가 삽입되어 がつ(gatsu) 혹은 げつ(getsu)라는 2음절 단어로 분화되었다. *[ɲiɪt] 역시 한국에서는 '일'이 되었으나 일본에서는 にち(nichi) 혹은 じつ(jitsu)가 되었다.
3. 입성 [-k]와 [-p]의 양국 수용 양상 대조
(1) 입성 [-k] (목구멍 막히는 소리)
  • 한국어 (ㄱ 받침 유지): 한국어는 'ㄱ' 종성이 발달했으므로 중국어 [-k]를 고스란히 'ㄱ' 받침으로 원형 보존했다. (예: 國 *[kwək] ->  / 學 *[ɦgʉæk] -> )
  • 일본어 ([-ku / -ki] 분화): 일본어는 자음 끝을 막을 수 없어 모음 [u]나 [i]를 결합해 'く(ku)' 'き(ki)' 음절로 탈바꿈시켰다. (예: 國 -> こく[koku] / 驛 -> えき[eki])
(2) 입성 [-p] (두 입술 막히는 소리)
  • 한국어 (ㅂ 받침 유지): 한국어는 'ㅂ' 종성을 활용해 중국어 [-p]의 입성 성질을 완벽히 'ㅂ' 받침으로 방어했다. (예: 法 *[pjap] ->  / 答 *[tạp] -> )
  • 일본어 ([-fu]의 순음퇴화와 장음화): 일본어는 초기에 [-p] 뒤에 모음 [u]를 붙여 [pu](훗날 'ふ[fu]') 음절로 받아들였다. (예: 法 -> はふ [hafu]). 그러나 역사적으로 일본어 단어 내 내포된 '하행(h-)' 발음이 모음 '우(u)'로 약화되는 '순음퇴화(ハ行転呼音)' 현상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hafu] -> [hau] -> ほう[hō]로 이행하며 음절 끝이 길게 늘어지는 장음화의 길을 걸었다. (예: 十 -> [jipu] -> [jiu] -> じゅう[jū])

V. 세종대의 고조음 재현과 《동국정운》식 표기의 음운학적 기획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직후 서적을 간행할 때 한자 뒤에 기이한 형태로 붙어있던 한글 표기, 즉 《동국정운(東國正韻)》(1447년) 체제는 세종대왕의 국가 통치 철학과 당대 최고 수준의 음운학적 통찰이 결합한 인위적 '음운 기획'의 결정체이다.
1. 《동국정운》의 편찬 목적과 언어 정치학
세종대왕이 보기에, 당시 조선 대중들이 사용하던 한자 발음(속음)은 세월이 흐르며 변형되고 오염된 '상스러운 소리'였다. 특히 중국의 정통 사서와 유교 경전을 올바르게 읽고 명나라와의 사대(事大) 외교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국 고대 서적의 정통 표준음인 고조음(古調音) 및 당·명대의 중원음(中原音) 체계를 규격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국가 주도로 표준 한자음 사전인 《동국정운》을 편찬하여 현실의 오독(誤讀)을 전면 교정하고자 했다.
2. 음운론적 미스터리와 교정 기획의 실체
(1) '이영보래(以影補來)'의 기획: ㄹ 받침의 입성성 복원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앞 장에서 논한 "조선인들이 중국의 입성 [-t]를 부드럽게 흘러가는 유음 'ㄹ'로 발음하는 현상"을 치명적인 오류로 규정했다. 입성은 급하게 숨을 끊어야 하는 소리인데, 'ㄹ'은 소리를 늘이는 성질이 있어 음운론적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 해결의 표기 기획: 세종은 'ㄹ' 받침 옆에 목구멍소리이자 성문 폐쇄음(Glottal Stop) 기능을 하던 여린히읗(ㆆ)을 강제로 병기하는 'ㅭ' 받침을 발명했다.
  • 음운학적 원리: 혀끝으로 'ㄹ' 발음을 부드럽게 시작하다가, 그 직후 'ㆆ'을 통해 목구멍을 콱 막아버리게(성문 폐쇄) 함으로써, 원래 중국 중고음 [-t]가 가졌던 급박한 입성(막히는 소리)의 효과를 한글 표기 메커니즘 안에서 완벽히 재현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를 '이응(여린히읗)으로써 래모(ㄹ)를 보충한다' 하여 '이영보래'라 칭한다. (예:  현실음 [월] -> 동국정운 표기 ᅟᅯᇭ)
(2) 초·중·종성 삼분법 강박과 형식적 이응(ㅇ) 받침 삽입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의 철학적 기반인 '천·지·인' 삼재 사상에 맞추어, 모든 소리는 반드시 '초성-중성-종성'의 세 단계가 결합해야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우주(음절)를 이룬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자어 중에는 받침이 없는 개음절 단어(예: 步, 家, 衣)가 무수히 많았다.
  • 해결의 표기 기획: 받침이 없는 한자어 표기 하단에 소리 값이 전혀 없는 '이응(ㅇ)'을 강제로 박아 넣었다. (예:  -> 보ᇡ)
  • 음운학적 원리: 시각적으로 초·중·종성의 완결성을 증명하려는 구조적 강박이자, 당시 중국 사전에 존재하던 미세한 모음 운미의 흔적을 형식적으로 보존하려는 학술적 기호였다. 이 'ㅇ' 받침은 묵음(Silent) 처리되어 실제 대중들이 발음할 때는 받침이 없는 것처럼 '보', '가'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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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핵심 논점인 ① 여몽간섭기 몽골어 어휘 유입과 언어·사회적 파장, ② 중세 국어 소실 문자(ㅸ, ㅿ, ㆍ)의 음운론적 도태 과정, ③ 한·일 양국의 중국 입성[-t, -p, -k] 수용 및 유음화 메커니즘, ④ 세종대 고조음 재현을 위한 《동국정운》 및 《홍무정운》의 음운 기획을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심층 분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