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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3선 건설(第三線建設)의 전략적 기원과 현대적 유산: 내륙 산업화의 빛과 그늘에 관한 심층 보고서 본문

중국 제3선 건설(第三線建設)의 전략적 기원과 현대적 유산: 내륙 산업화의 빛과 그늘에 관한 심층 보고서
냉전의 긴장과 전략적 결단: 제3선 건설의 기점
1960년대 초중반,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 존립의 위협을 전방위적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 정세는 미·소 양대 강국과의 관계가 동시에 악화되는 전례 없는 고립 상태로 치닫고 있었으며, 이는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국가 방위 전략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하게 만들었다.1 특히 1964년을 기점으로 가속화된 '제3선 건설(Sānxiàn jiànshè)'은 단순한 지역 발전 계획이 아닌, 핵전쟁을 포함한 전면전에 대비하여 국가의 핵심 산업 역량을 내륙 깊숙한 곳으로 이전시키려는 거대 군사-지정학적 프로젝트였다.1
이 거대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안보 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선, 중소 분쟁의 심화로 인해 북쪽 국경에서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1969년 진보도(珍寶島) 사건으로 상징되는 소규모 무력 충돌은 전면전의 공포를 현실화했다.4 동시에 남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에스컬레이션되면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강화되었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은 중국 동남부 해안을 통한 미군의 침공 가능성을 시사하며 지도부를 압박했다.5 마오쩌둥은 당시 중국의 산업 시설이 동북부와 연안 지역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어, 적의 공습이나 핵 공격 한 번에 국가의 생산 능력이 완전히 마비될 수 있다는 점을 극도로 우려했다.1
마오쩌둥은 "원자폭탄 시대에는 전략적 후방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적이 침공해올 경우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장기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는 특히 "판지화(攀枝花) 건설이 완료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다"고 언급할 정도로 내륙 강철 기지 건설에 집착했다.8 이러한 배경에서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약 16년 동안 지속된 제3선 건설은 중국 내륙 13개 성과 자치구에 걸쳐 1,100개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를 탄생시켰으며, 이는 당시 중국 전체 인프라 투자액의 약 40%에 해당하는 2,052억 위안이 투입된 유례없는 국가 사업이 되었다.5
지정학적 분류체계: 1선, 2선, 그리고 대삼선과 소삼선
제3선 건설은 중국의 전 영토를 전쟁 수행 능력과 방어 가치에 따라 세 개의 동심원 구조로 재편했다. 이러한 지리적 구분은 국방의 종심(Defense in Depth)을 확보하여 적의 공격으로부터 핵심 자산을 보호하려는 군사 전략적 의도를 반영한다.1
지리적 방어선과 국가 자산의 재배치
1선 지역은 해안가와 북부 국경 지대를 포함하며, 전쟁 발발 시 적의 일차적인 타격 목표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1 여기에는 상하이, 베이징, 톈진과 같은 대도시와 만주의 중공업 지대가 포함되었다.1 2선 지역은 1선과 3선 사이의 완충지대로, 안후이, 장시, 허난 일부 지역이 이에 해당했다.1
핵심이 되는 3선 지역, 즉 '대삼선(大三線)'은 중국의 서부 및 서남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했다. 이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 덕분에 공습으로부터 은폐가 용이하고,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적의 침투가 어려운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1 구체적으로는 쓰촨성(충칭 포함), 귀저우성, 윈난성, 산시성, 간쑤성, 닝샤, 칭하이성 등이 이 거대한 전략적 후방 기지의 핵심을 이루었다.1
| 방어선 구분 | 주요 포함 지역 | 주요 역할 및 특징 |
| 제1선 (First Line) | 해안 성(省), 동북부 국경, 대도시(상하이, 베이징 등) | 국방의 최전방, 기존 산업 밀집지, 공격 취약 지역 |
| 제2선 (Second Line) | 안후이, 장시, 허난 등 중부 내륙 일부 | 1선과 3선의 완충지대, 보급 및 중간 방어 거점 |
| 제3선 (Third Line) | 쓰촨, 귀저우, 윈난, 산시, 간쑤, 칭하이 등 서남/서북 내륙 | 전략적 총후방, 자급자족 산업 기지, 핵심 군사 시설 이전지 |
1
소삼선(小三線)의 전술적 배치
대삼선 외에도 각 성(省)은 자체적인 방어 역량을 갖추기 위해 '소삼선' 건설을 병행했다.1 이는 연안 지역이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성들이라도 성 내부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 소규모 군사 및 공업 시설을 분산 배치하여, 중앙 정부와의 연결이 끊어지더라도 독자적으로 장기 저항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 산시(山西), 안후이, 허베이의 험준한 지역들이 대표적인 소삼선 기지로 활용되었으며, 이러한 분산 배치는 전국을 거대한 요새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1

‘산(山), 산(散), 동(洞)’의 원칙과 군사적 합리성
제3선 건설의 가장 독특하면서도 논란이 되는 지점은 그 설계 원칙인 '고산분산인폐(靠山, 分散, 隱蔽)'에 있다. 이는 "산에 가깝게, 흩어지게, 숨겨지게"라는 뜻으로, 이후 "산속으로, 흩어져서, 동굴로(山, 散, 洞)"라는 더욱 극단적인 원칙으로 발전했다.1
은폐를 위한 비효율의 감수
군사적 생존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산업적 효율성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공장들은 넓은 평지에 집단적으로 건설되는 대신, 좁은 골짜기나 험준한 산비탈에 파편화되어 배치되었다.1 이러한 배치는 공습 시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었지만, 원자재 운송과 제품 조립, 노동자들의 이동에 엄청난 물류적 비용을 발생시켰다.7 예를 들어 한중(漢中) 항공 공업 기지는 28개의 하부 단위가 7개 현에 걸쳐 흩어져 있어, 부품 하나를 옮기는 데에도 험난한 산길을 넘어야 하는 비효율을 감수해야 했다.7
가장 기밀을 요하는 시설들은 아예 산을 뚫어 거대한 동굴 속에 건설되었다.6 귀양(貴陽)의 한 전자부품 공장은 습기가 가득한 동굴 속에 세워졌는데, 정밀한 기술이 필요한 전자부품들이 습기로 인해 불량률이 치솟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5 또한, "산에 의지한다"는 원칙을 과도하게 적용한 나머지, 저수지 바로 아래 계곡에 공장을 세워 홍수 위험에 상시 노출되거나, 산사태 위험 지역에 주거 시설을 짓는 등 객관적인 경제 및 안전 법칙을 위배하는 사례가 빈번했다.7
'삼변(三邊)' 방식의 조급한 건설
전쟁의 위협이 눈앞에 닥쳤다는 긴박함 때문에 많은 프로젝트가 '삼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설계하면서, 시공하면서, 동시에 생산하는(邊設計, 邊施工, 邊生產)" 방식이다.1 체계적인 사전 조사 없이 진행된 이러한 건설 방식은 설계 변경이 잦고 건축 품질이 낮아지는 원인이 되었으며, 초기 투자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자원의 낭비를 초래했다.1
거대 공업 기지의 탄생: 반지화와 면양, 중경
비효율적인 배치에도 불구하고, 제3선 건설은 중국 서부 내륙에 강력한 산업 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철강, 에너지, 국방 기술 분야에서 현대 중국의 기틀이 된 주요 도시들이 이 시기에 탄생하거나 급성장했다.3
반지화(攀枝花): 강철의 기적과 현대적 변모
쓰촨성과 윈난성의 경계에 위치한 반지화는 제3선 건설의 '총아'로 불린다.11 건설 이전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황무지였으나, 마오쩌둥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대규모 바나듐-티타늄 자철광 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철강 기지로 탈바꿈했다.9 험준한 지형 때문에 도시 계획이 마치 '상아에 정밀 조각을 하는 것(象牙微雕)'만큼이나 정교하고 어려웠지만, 전국에서 몰려든 수십만 명의 건설 인력은 불과 몇 년 만에 내륙 최대의 철강 도시를 건설해냈다.9 1970년 첫 쇳물을 생산한 반지화는 서부 지역의 철강 자급자족을 가능케 했으며, 현재는 전 세계 티타늄 매장량의 1위, 바나듐 매장량 3위를 차지하는 전략 자원 기지로 성장했다.11
면양(綿陽)과 국방 과학 기술의 결집
면양은 제3선 건설을 통해 '중국의 과학기술 도시'로 거듭났다. 이곳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공기역학 연구 센터와 핵무기 개발을 위한 각종 연구소, 국방 전자 산업 기지가 집중되었다.14 '양탄일성(两弹一星, 원자폭탄·수소폭탄·인공위성)'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핵심 국방 기술 대부분이 이 안전한 내륙 기지에서 완성되었다.16 특히 이곳의 전자 산업 기반은 훗날 중국 가전 시장을 제패한 '창홍(長虹)'과 같은 기업의 모태가 되었다.12
성곤철도(成昆鐵路): 산맥을 뚫은 혈맥
제3선 산업 기지들을 연결하기 위해 험난한 지형을 뚫고 철도가 건설되었다. 그중 성도와 곤명을 잇는 성곤철도는 20세기 공학의 기적으로 평가받는다.8 횡단산맥과 운귀고원의 극도로 복잡한 지질 조건을 극복하며 수백 개의 교량과 터널을 건설했는데, 당시 사용된 13개 기술이 세계 기록을 경신할 정도로 고난도의 공사였다.16 이 철도는 서남부 지역의 고립을 해소하고 제3선 건설 물자를 운송하는 핵심 동맥 역할을 수행했다.16
| 주요 거점 및 인프라 | 핵심 기능 | 지리적 위치 | 역사적/현대적 의의 |
| 반지화 철강 기지 | 철강 생산, 바나듐-티타늄 채굴 | 쓰촨/윈난 접경 | 내륙 자급자족의 상징, 전략 자원 확보 |
| 면양 과학기술성 | 핵무기, 항공우주, 전자 기술 | 쓰촨성 북부 | 국방 현대화의 중추, 하이테크 산업 클러스터 |
| 중경 병기 기지 | 재래식 무기, 장갑차, 차량 제조 | 충칭시 | 서부 최대의 중공업 도시, 자동차 산업의 모태 |
| 육반수(六盤水) 석탄 기지 | 에너지(석탄) 공급 | 귀저우성 | 철강 산업용 연료 보급, 내륙 동력원 확보 |
| 성곤철도 (成昆鐵路) | 물류 및 교통 동맥 | 쓰촨 ~ 윈난 | 지형적 한계 극복, 서남부 지역 통합 및 발전 |
9
인적 이동과 사회적 소우주: ‘단위 사회’의 형성
제3선 건설은 단순한 공장 건설을 넘어, 중국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인구 이동을 수반했다. "좋은 사람, 좋은 말은 제3선으로(好人好馬上三線)"라는 구호 아래, 상하이, 베이징, 심양 등 연안 대도시의 엘리트 기술자, 과학자, 숙련 노동자 400만 명 이상이 가족과 함께 내륙 산간 지대로 이주했다.1
'단위 사회'라는 폐쇄적 공동체
험난한 산속에 세워진 공장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모든 기능을 자급자족해야 했다. 이에 따라 공장이 주거, 교육, 의료, 여가를 모두 책임지는 '단위 사회(Dānwèi shèhuì)'가 형성되었다.6 공장 울타리 안에 병원, 상점, 학교가 갖춰져 있어 노동자들은 산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으며, 이는 전쟁 대비를 위한 기밀 유지와 통제에 유리한 구조였다.6 하지만 이러한 고립은 외부 세계, 특히 인근 현지 주민들과의 심각한 문화적, 경제적 괴리를 낳았다.18
도시에서 온 이주민들은 현지 농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교육 수준, 복지 혜택을 누렸으며, 이는 '우리(공장 사람)'와 '그들(지역 농민)'이라는 심리적 경계를 만들었다.18 현지 농민들은 공장 울타리 바로 옆까지 농사를 지으며 공장에서 나오는 자원을 얻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토지 이용이나 비료 수급 등을 둘러싼 갈등이 빈번했다.18 공장은 지역 주민들에게 일부 이익을 양보하거나 편의를 제공하며 불안한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18
‘제3선 정신’과 정체성
혹독한 환경과 단절된 생활 속에서도 건설자들을 지탱한 것은 강력한 국가주의적 신념이었다. "부모님 생각도, 고향 생각도 하지 말고, 쇳물을 뽑기 전엔 집에 가지 않겠다(不想爹, 不想媽, 不出鐵, 不回家)"는 처절한 구호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잘 보여준다.13 이러한 희생정신은 훗날 '제3선 정신(艰苦奋斗, 无私奉献)'으로 정형화되어 중국 현대화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으로 평가받게 되었다.18 이들의 후손인 '제3선 자제(三線子弟)'들은 현지 방언 대신 표준어를 사용하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서부 내륙 도시들의 인구 구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18
경제적 효과와 효율성의 딜레마
경제학적으로 볼 때, 제3선 건설은 지역 간 격차 해소라는 성과와 국가적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내륙 산업화의 마중물
제3선 건설은 산업 인프라가 전무하던 서부 지역에 강제적으로 제조 역량을 이식함으로써 장기적인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4 연구에 따르면, 제3선 투자가 집중된 지역은 시장 개혁 이후에도 제조업 비중이 높게 유지되었으며, 만약 이 건설이 없었다면 2010년 기준 연안과 내륙의 1인당 GDP 격차는 지금보다 약 20% 더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4 즉, 단기적인 효율성은 낮았을지라도 서부 대개발(Great Western Development)을 위한 물리적 기반과 기술적 토대를 닦은 셈이다.6
집적 이익의 상실과 국가적 손실
반면, 국가 전체의 자원 이용 효율성 측면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경제 발전의 핵심 원리인 '집적 효과(Agglomeration Economics)'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공장을 분산 배치했기 때문에, 투입된 자본에 비해 산출되는 경제적 가치는 매우 낮았다.72,000억 위안이라는 거금은 국방이라는 특수 목적을 위해 소비되었을 뿐, 시장 경제 논리에 따른 부의 창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7 많은 기업이 국가 보조금 없이는 자생하기 힘든 구조였으며, 이는 훗날 국유기업 개혁 과정에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으로 되돌아왔다.21
개혁개방 이후의 위기와 조정: 산속의 공장들이 겪은 진통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제3선 건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국가의 전략 중심이 '전쟁 대비'에서 '경제 성장'으로 옮겨가고, 효율성이 낮은 내륙 대신 연안 지역에 투자가 집중되면서 산속에 고립된 제3선 기업들은 생존의 기로에 섰다.6
'제3류 기업'의 몰락과 공동화(空洞化) 현상
1980년대 초, 정부는 제3선 기업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그중 '제3류 기업', 즉 지형이 너무 험하고 기술이 낙후되어 회생 가능성이 낮은 기업들은 폐쇄되거나 파산했다.6 한때 수만 명이 거주하던 활기찬 공장 마을들은 순식간에 버려진 유령 도시가 되었고, 이는 현대 여행객들이 목격하는 '낙후된 현급시'의 원형이 되었다.6
특히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공장들은 정보의 고립으로 인해 세계적인 기술 트렌드에서 뒤처졌고, 생산된 제품은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다.6 "동굴 속의 몇 달이 세상의 천 년과 같다(洞中方數月, 世上已千年)"는 말은 당시 제3선 기업들이 겪은 기술적 고립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6
대규모 이전과 도시화의 재편 (1984~2000년대)
생존 가능한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탈험이전(脫險搬遷)' 프로젝트를 시행했다.22 1984년부터 시작된 이 대규모 조정 사업을 통해 수백 개의 공장이 산속에서 나와 인근 중소도시나 성도(省都)로 거처를 옮겼다.22
- 근거리 이전: 험준한 계곡에서 나와 교통이 편리한 인근의 현급시나 지급시 외곽으로 이전.23
- 원거리 이전: 핵심 기술 기업이나 연구소는 성도(청두, 시안, 란저우 등)나 대도시로 통합 이전.23
- 군전민(軍轉民): 군수 물자 생산에서 가전, 자동차 등 민수용 제품 생산으로 업종 전환.6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살아남았을지 모르나, 공장이 떠난 원래의 산간 지역은 경제적 기반이 완전히 붕괴하며 낙후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6
현대 중국의 ‘지급시 낙후’ 현상과 제3선의 상관관계
질문자가 중국 여행 중 목격한 지급시나 현급시의 의외의 낙후함은 제3선 건설이 남긴 '탈도시화(De-urbanization)'의 유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3
도시 성장을 저해한 분산 배치
일반적인 산업화 과정에서는 공장이 도시로 모여들며 인프라가 개선되고 서비스업이 발달하지만, 제3선 건설은 "도시를 피하라"는 군사적 명령에 충실했다.1 산업 시설이 인구 밀집 지역과 떨어진 산지에 파편화되면서, 산업화가 도시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가 끊어졌다.3 그 결과, 공장만 있고 도시의 기능은 부재한 기형적인 정착지들이 양산되었다.3
인프라의 노후화와 유지 비용의 과부하
험난한 지형에 세워진 도로, 전력망, 수도 시설은 유지보수 비용이 평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1 개혁개방 이후 국가 예산이 연안으로 쏠리면서 이러한 내륙 시설들은 빠르게 노후화되었고, 자생적인 산업 기반이 약한 지방 정부는 이를 개선할 재정적 능력이 없었다.7 또한, 과거 '단위 사회' 시절 공장이 제공하던 복지 서비스를 지방 정부가 떠안으면서 발생한 재정 부담은 지역 발전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18
정보와 시장의 단절
산간 지역에 위치한 지급시들은 물류 비용이 비싸고 외부 시장과의 정보 교환이 늦어, 민간 투자가 기피되는 지역이 되었다.6이는 과거의 화려했던 국영 공장 시절의 잔해와 현재의 빈곤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냈으며, 외지인의 눈에는 국가적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낙후함으로 비치게 된 것이다.6
2024년 ‘전략적 대후방’ 정책으로의 회귀와 연속성
흥미로운 점은 제3선 건설의 논리가 6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중국의 국가 전략으로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4년 중국 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3중전회)를 전후하여 '국가 전략적 대후방(國家戰略大後方)' 건설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다.15
새로운 지정학적 환경과 자급자족
미·중 갈등의 심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현대적 위기 속에서, 중국 지도부는 다시 한번 내륙의 안전한 산업 기반을 필요로 하고 있다.2 과거의 제3선 건설이 핵전쟁 대비였다면, 현대의 전략적 대후방 건설은 기술 봉쇄와 무역 제재에 대비한 '경제적 자급자족 기지'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둔다.15
- 에너지 및 자원 안보: 서부 지역의 풍부한 천연가스, 태양광, 전략 광물을 활용한 에너지 자립.11
- 핵심 기술의 내륙 분산: 연안의 데이터 센터와 첨단 제조 시설을 내륙(귀저우 등)으로 이전하여 사이버 공격 및 물리적 타격에 대비.11
- 서부 대개발과의 시너지: 기존 제3선 건설의 유산인 성곤철도나 반지화의 제조 시설을 현대화하여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활용.6
과거로부터의 학습
현대의 대후방 건설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산속 은폐 대신, 청두나 중경과 같은 거점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클러스터형 발전'을 지향하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15 그러나 여전히 "안전"을 위해 "효율성"을 일부 희생해야 한다는 전략적 기조는 과거 제3선 건설의 DNA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
결론: 역사의 유산에서 미래의 기반으로
중국 제3선 건설은 냉전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낳은 거대한 광기이자 동시에 숭고한 도전이었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 경제적 합리성을 포기했던 이 프로젝트는 서부 내륙에 강력한 산업의 씨앗을 뿌렸지만, 동시에 파편화된 도시 구조와 낙후된 지역 경제라는 무거운 짐을 현대 중국에 남겼다.3
여행자가 목격한 지급시의 낙후함은 과거 "산속으로, 동굴로" 숨어들어야 했던 국가의 절박함이 남긴 흉터와 같다. 하지만 그 낡은 공장 담장 너머에는 반지화의 바나듐 강철이 있고, 면양의 첨단 레이더가 있으며, 수천만 명의 이주민이 일구어낸 독특한 삶의 궤적이 살아 숨 쉬고 있다.11 제3선 건설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이 서구의 압박에 맞서 다시금 내세우는 '전략적 후방'의 토대로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역사가 되고 있다.15
| 분석 항목 | 과거 제3선 건설 (1964-1980) | 현대 전략적 대후방 (2024~ ) |
| 주요 위협 | 미·소의 물리적 침공 및 핵 공격 | 기술 봉쇄, 공급망 차단, 무역 제재 |
| 핵심 원칙 | 산속 은폐, 분산 배치, 동굴 건설 | 디지털 연결, 에너지 자립, 내륙 거점 강화 |
| 투자 중심 | 중공업, 재래식 병기, 철도 인프라 | 신에너지, 데이터 센터, 하이테크 제조 |
| 경제적 성격 | 철저한 계획 경제, 비시장적 배분 | 시장 경제와 국가 전략의 결합 (군민융합) |
| 지리적 무게중심 | 서남/서북 산간 오지 | 청두, 중경, 귀양 등 서부 핵심 대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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