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碗粉蒸肉

Poohsi&Company 2025. 3. 11. 21:11



碗粉蒸肉
半碗粉蒸肉,傷了少年心
我永遠記得六歲那年的除夕。
1988年歲末,我獨自在母親的宿舍等她歸來。室外天寒地凍,宿舍內因悄聲燃燒的蜂窩煤而顯得溫暖許多。
我餓了,開始不停往那口冒著蒸汽的鋁鍋望去,混合著蒸汽一同彌漫的,是滿屋粉蒸肉的香味。
我到底還是抵不住肉香的誘惑,揭開鍋蓋,夾了一片粉蒸肉放進嘴里,心里想著“再吃一片就好”,嘴上卻不停,連吃了半碗。
我吃得正酣,母親帶著一身冷氣回來了。她推門而入時,我嘴里正含著一塊肥肉,母親掃視了一圈屋內,直盯著我,走了過來。當即就是一頓連扇帶打,我張著嘴哇哇大哭,半塊肉連同涎水一起掉了出來。揍過我之后,母親就端起那碗粉蒸肉摔門而走,留下我一人在她簡陋的職工宿舍里不停抽噎。
過了一段時間,母親又端著那碗粉蒸肉回來了。她慍怒已消,面容恢復到一貫的喪氣,順手把碗放進鍋里重新熱了熱,然后端出來,讓我跟她一塊吃。
吃完那碗粉蒸肉,按母親的說法,“就算是過了除夕”。
母親用如此粗暴的方式體罰我,在那時已成習慣,而且往往毫無緣由。
早在我尚不記事的幼年,母親便因多疑整日與我父親爭吵,她偏執地認定,父親在他廠里有個相好,父親偏偏是一個沉郁寡言的男人。在妻子數次追鬧到單位之后,直接消失得杳無蹤跡。
母親覺得自己的生活更加失敗透頂了。她原先是國營塑料廠的編制縫紉工,婚姻變故沒多久后,被調換成燒火工,只有噪聲和孤獨與她為伴。每況愈下的處境加之原有的性格,在她身上形成了惡性循環。
她常常無端趾高氣揚地對車間臨時工頤指氣使,或者和正式工發生摩擦,回到宿舍面對我時,經常是一觸即發的毆打。
即便是那樣普天同慶的除夕之夜,在母親和我的世界里,也愈加像是一出悲劇。

### 炒菜滿屋香,母親撐起家
20世紀90年代,市場經濟在我們這個山區小縣城也開始活泛起來,母親和我的生活也不再那麼捉襟見肘了。
母親所在的車間被私人老板承包,工人工資由計時變為計件,當時母親的工種已經調回縫紉工,整天在縫紉機前縫蛇皮袋,一個五分錢,一天能做三四百個。為了多掙工時,母親每天都在工廠里干得熱火朝天。私人老板另有一個竹制品廠,母親和一些同事又擠時間攬縫制麻將涼席的活兒。母親雙手遍布的傷痕和繭疤就是那時留下的。
當然,每個月領到的工資足以令母親喜笑顏開好一陣。幾乎每次,母親拿上工資的第一件事,就是去菜市場買肉。母親總會麻利地將蜂窩煤爐和灶具搬到屋門口,菜籽油燒得旺熱,肉片入鍋的“嗞啦”聲,鍋鏟炒動的節奏,升騰而起的油煙隨之傳來……我緊張而愉悅地站在一旁,看母親彎著腰皺著眉頭,全然沉浸在這場表演中。
待炒菜的滋味彌漫了整個走廊,隔壁屋子傳來一句短促的“好香呀”,我忽然間,也是第一次想到“幸福”這個詞。
為了多掙錢,母親也走了不少彎路。她并沒有做生意的經驗,卻忽然辦了三年的停薪留職。緣由是偶然結識了一個把茶葉生意做得風生水起的女人,那個女人告訴她,現在做服裝生意很紅火,如果從西安批發服裝過來,穩穩能賺大錢。
就憑這幾句,母親下了海。人生地不熟地來到西安康復路,跟著賣茶葉的女人到處去鄉下趕集售賣。可是辛苦的付出并沒有回報,后來母親重新回到廠里上班。
雖然做生意失敗了,但母親讓我看到了她勤勞、堅強的一面。

相親遇“直男”,肉片識真心
雖然母親的脾氣暴躁,但她依舊給予我盡可能多的愛,用屬于她自己的方式。
一個碎嘴的中年婦女,有段時間成天往我家跑,目的是想說服母親嫁給一個河北的煤礦工。最終,母親松了口,答應見他一面。見面地點是這個婦女家里。
婦女不停對母親講對方的好處。男人木訥、老實,半天才說上一句話,似乎眼見事情要成,那婦女樂開了花似的不停說:“多好的男人呀,實在,靠得住。”
但后來,母親卻翻了臉。
男人買了半斤肉和一些下酒菜,那婦女就拿著去廚房忙活了,不大一會兒,飯菜做好,我們幾個人圍在桌前。有飯菜堵嘴,男人更加沒有話說,一個勁往嘴里刨食。
那桌飯上恰好有一碗粉蒸肉,母親先給我碗里夾了兩片,可是我并沒有食欲。對面的男人則不停給自己碗里夾肉,不大一會兒,一碗粉蒸肉眼見著就要被他掃光。
母親的臉色越來越難看,不等吃完,“啪”的一聲將筷子拍在桌上,拉起我的手就往外走。那婦女慌了神追出來,可顯然攔不住氣頭上的母親。
母親最終扔下了一句話:“在我面前,誰也別想搶我兒子的肉!”
此后每年的年夜飯,我家桌上照例都有粉蒸肉,但不知什麼緣由,我卻很少再動筷子了。

琳瑯滿屋菜,唯缺粉蒸肉
2001年,我考上省城的大學,母親也分到了職工安置房。那年寒假回家過年,母親特意操持了滿滿一大桌酒菜。
桌上仍然有粉蒸肉。
我忽然就想起了1988年的那個除夕,便開玩笑地和母親說:“媽,你記不記得小時候有次過年,我偷吃了半碗粉蒸肉,你把我打了一頓?”
母親的視線在杯盤間來回巡視,笑容卻如同河水的落汐一般逐漸褪去:“咋不記得……你得體諒你媽當時的處境……”
接著,母親講了那天我不知道的事。
那時,我們的生活非常窘迫,廠里的工資常常還不夠娘倆的開銷。眼見到了年關,母親還是湊不齊置辦年貨的錢,只好在除夕那天早上跟廠里的同事借。母親央求許久,一位電工終于從家里拿出一塊肉來,說:“只能幫到這些了。”
母親拿了肉回來,拌了紅薯和米粉蒸了一碗粉蒸肉,算是那天晚上的年夜飯。忙完這些,她再出門辦事,迎面碰上了電工的媳婦。那媳婦辱罵我母親,非要她把那塊肉還回來。母親和她大吵了一頓,回來就端走我吃過的那碗肉要還給她。
后來,還是工友們勸住了爭吵的雙方,我和母親才得以吃到那半碗粉蒸肉,度過除夕,迎接新年。
母親講完,眼淚就啪嗒啪嗒往下掉,好一會兒,母親才問我:“你還記得呀?”我趕忙說:“不是,只不過剛剛想起來,隨口問一句。”母親又問:“那你咋后來一直不愛吃粉蒸肉了?”我沉默半天才說:“太肥了,吃不動。”
又過了十多年,母親早已退休,我因為經年疲于奔命,很久都沒能與母親好好團聚。直到2014年,我在省城付了首付買了房,才把母親接到新房子里過了個年。
那年年夜飯由我親自操持,我忙活了一下午做了一桌菜。母親笑瞇瞇地望著精致的杯盤,看著那些大閘蟹、白灼蝦、多寶魚、花蛤和扇貝……就讓我教教她這些東西。
吃了幾口,她淡淡地說:“過年還是要吃肉啊。”
此時的我,已經很少吃肉了。但思緒忽然就回到1988年除夕,我知道,那碗粉蒸肉飄溢的糯香味,將永遠縈繞在我們母子之間。


반 그릇의 분증육, 상처받은 소년의 마음

나는 여섯 살이었던 그해 섣달그믐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1988년 연말, 나는 어머니의 숙소에서 혼자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은 몹시 추웠지만, 숙소 안은 은근히 타오르는 벌집탄 덕분에 훨씬 따뜻했다.

배가 고파졌다. 나는 자꾸만 김이 피어오르는 알루미늄 냄비를 바라보았다. 김과 함께 퍼지는 것은 온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분증육(고기와 쌀가루를 함께 쪄낸 요리)의 향기였다.

결국 나는 고기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뚜껑을 열었다. 젓가락으로 분증육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한 조각만 먹자’라고 생각했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반 그릇을 먹어치웠다.

한창 먹고 있을 때, 어머니가 싸늘한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돌아왔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한 조각의 비계를 입에 물고 있었다. 어머니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곧장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다가왔다.

곧바로 뺨을 맞고, 매를 맞았다. 나는 입을 벌리고 엉엉 울었다. 반쯤 씹던 고기는 침과 함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나를 때린 후, 아무 말 없이 그릇을 들고 방을 나갔다. 나는 좁고 초라한 숙소에 혼자 남아 흐느껴 울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분증육이 담긴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분노는 사라졌고, 늘 그렇듯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그릇을 다시 냄비에 넣어 데운 뒤 내 앞에 내밀었다.

“먹어라.”

우리는 함께 그 한 그릇의 분증육을 먹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이걸로 섣달그믐은 지난 거다.”



요리가 온 방을 가득 채우던 날들, 어머니가 집을 떠받치다

1990년대, 시장경제의 물결이 우리 산골 작은 도시에까지 스며들었다. 어머니와 나의 생활도 더 이상 그토록 쪼들리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일하는 작업장은 개인 사업자가 인수했고,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 체계도 시간제에서 성과제로 바뀌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재봉공으로 다시 배치되었고, 하루 종일 재봉틀 앞에서 뱀 가방을 꿰맸다. 하나에 5전(약 50원), 하루에 300~400개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다. 공장 외에도 동료들과 함께 마작 자리용 대나무 자리를 만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상처와 굳은살이 가득했다.

하지만 월급날이면 어머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었다. 거의 매번 월급을 받으면 가장 먼저 시장으로 달려가 고기를 샀다.

그 후, 숙소 문 앞에 벌집탄 화로와 조리 기구를 꺼냈다. 채소 기름이 펄펄 끓어오르면 고기가 팬에 떨어지는 ‘치익’ 소리가 났다. 주걱이 바쁘게 움직이고, 기름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긴장된 채 기쁨을 느끼며 어머니의 옆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고소한 냄새가 복도를 가득 메우면, 이웃집에서 “와, 맛있는 냄새야.”라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문득, ‘행복’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떠올렸다.



맞선에서 만난 ‘직진남’, 고기 한 점이 드러낸 진심

어머니는 성격이 거칠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에게 최대한의 사랑을 주었다.

어느 날, 수다스러운 중년 여성이 우리 집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녀는 어머니를 설득해 하북 출신 탄광 노동자와 맞선을 보게 하려 했다. 결국 어머니는 마음을 바꾸고, 한 번 만나보기로 했다.

만남 장소는 그 여성의 집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그 남자의 장점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이 남자는 정직하고 성실해요. 말이 좀 없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어머니는 곧 기분이 상했다.

남자는 반 근(250g)의 고기와 몇 가지 안주거리를 사 왔다. 주인은 그것으로 요리를 만들었다.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그 남자는 말없이 밥을 퍼먹었다.

식탁에는 마침 분증육이 한 그릇 있었다. 어머니는 내 그릇에 먼저 두 점을 집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반면 남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그릇에 고기를 퍼 담았다. 잠시 후, 분증육 한 그릇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어머니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결국, 밥도 다 먹기 전에 그녀는 탁자를 ‘쾅’하고 내려쳤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이끌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놀란 주인이 어머니를 붙잡았지만, 화가 난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문 앞에서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앞에서, 내 아들 고기 빼앗아 먹을 생각은 하지 마라!”

그날 이후, 우리 집의 연말 식탁에는 언제나 분증육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그 요리를 먹고 싶지 않았다.



음식으로 가득한 식탁, 그러나 분증육만은 사라졌다

2001년, 나는 성도(省都)의 대학에 입학했고, 어머니도 노동자 주택을 배정받았다.

그해 설날, 어머니는 정성껏 차린 한 상의 요리를 내놓았다.

식탁 위에는 여전히 분증육이 있었다. 나는 문득 1988년의 섣달그믐이 떠올랐다. 장난스럽게 물었다.

“엄마, 나 어릴 때 설날에 분증육 몰래 먹었다가 맞은 거 기억나?”

어머니는 식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어찌 기억 못 하겠니. 그땐 엄마 사정 좀 이해해라.”

그러더니 어머니는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해, 우리는 너무 가난했다. 공장 월급으로는 생활비가 빠듯했다. 설이 다가왔지만, 어머니는 제사상에 올릴 고기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는 공장 동료에게 사정했다. 한 전기 기술자가 겨우 한 덩이의 고기를 내어주며 말했다.

“이것밖에 못 도와줘.”

어머니는 그 고기를 가져와서 고구마와 쌀가루를 섞어 분증육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전기 기술자의 아내가 와서 고기를 돌려달라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그릇을 들고 나가려 했지만, 동료들이 중재하여 결국 반 그릇을 지켜냈다.

이야기를 마친 어머니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후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바쁜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2014년, 나는 성도에서 집을 마련했고, 어머니를 불러 설을 함께 보냈다.

그해 설날 음식은 내가 준비했다.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음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날에는 그래도 고기를 먹어야지.”

그 순간, 나는 1988년의 섣달그믐을 떠올렸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그 분증육의 고소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