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反五反”运动

1952年“三反五反”运动
Dì yī bō: 1952 nián “sān fǎn wǔ fǎn” yùndòng
제1차 파동: 1952년 「삼반오반」 운동
这场运动最初以反腐败和打击经济犯罪为名,但迅速演变为对旧工商业者、旧政府官员和知识分子的政治清算。
Zhè chǎng yùndòng zuìchū yǐ fǎn fǔbài hé dǎjī jīngjì fànzuì wéi míng, dàn xùnsù yǎnbiàn wéi duì jiù gōngshāng yèzhě, jiù zhèngfǔ guānyuán hé zhīshífènzǐ de zhèngzhì qīngsuàn.
이 운동은 처음에는 부패 척결과 경제 범죄 단속을 명분으로 했지만, 곧 구(舊) 공상업자·구정부 관료·지식인들에 대한 정치적 숙청으로 변질되었다.
在“公私合营”和“阶级斗争”的背景下,许多企业家、资本家面临财产被没收和人格被侮辱的双重打击。
Zài “gōngsī héyíng” hé “jiējí dòuzhēng” de bèijǐng xià, xǔduō qǐyèjiā, zīběnjiā miànlín cáichǎn bèi mòshōu hé réngé bèi wǔrǔ de shuāngchóng dǎjī.
‘공사 합영’과 ‘계급투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많은 기업가와 자본가들은 재산 몰수와 인격 모욕이라는 이중 타격을 맞았다.
例如,民生公司的创始人卢作孚,在被批判后选择服毒自尽,他的死象征着旧时代工商精英在新生政权面前的无力与绝望。
Lìrú, Mínshēng gōngsī de chuàngshǐrén Lú Zuòfú, zài bèi pīpàn hòu xuǎnzé fúdú zìjìn, tā de sǐ xiàngzhēng zhe jiù shídài gōngshāng jīngyīng zài xīnshēng zhèngquán miànqián de wúlì yǔ juéwàng.
예컨대 민생회사 창립자 루쭈어푸(卢作孚)는 비판을 받은 뒤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으며, 그의 죽음은 구시대 공상업 엘리트가 신생 정권 앞에서 느낀 무력과 절망을 상징했다.
在这个时期,自杀主要源于对经济基础被剥夺和阶级身份“原罪化”的恐惧。
Zài zhège shíqī, zìshā zhǔyào yuányú duì jīngjì jīchǔ bèi bōduó hé jiējí shēnfèn “yuánzuìhuà” de kǒngjù.
이 시기의 자살은 주로 경제적 기반의 박탈과 계급 신분이 ‘원죄화’되는 데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삼반오반 운동(三反五反)은 그 자체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의 **대약진 운동(大跃进)**과 **문화대혁명(文革)**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토대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운동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후기 운동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비판적 목소리의 제거
삼반오반 운동과 특히 그 이후의 **반우파 투쟁(反右派斗争)**은 지식인과 경제계 인사들의 독립적인 사고와 비판적 목소리를 조직적으로 탄압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수많은 지식인, 전문가, 사업가들이 투쟁의 대상이 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공포와 순응의 문화가 사회 전체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권력 집중의 강화
삼반오반 운동은 당과 국가가 모든 사회 영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우파 투쟁을 거치면서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권위는 절대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그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세력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중앙집권화는 이후 대약진 운동과 같은 극단적인 정책이 반대 없이 추진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투쟁 문화의 정착
초기 운동들은 대중을 동원하여 비판(批判)과 숙청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정치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하고, 공격하는 행위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는 이후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红卫兵)들이 무자비한 투쟁과 폭력을 행사하는 심리적, 사회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미 사회적 관계와 인륜이 크게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폭력과 억압이 더욱 쉽게 용인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삼반오반 운동은 단순히 부패와 비리를 척결하는 것을 넘어, 공포와 순응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권력을 극도로 집중시키며, 대중 투쟁 문화를 제도화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대약진 운동 시기, 전문가들의 경고를 묵살하고 허황된 계획을 강행하게 만들었고, 문화대혁명 시기,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대규모 혼란을 초래하는 핵심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 일어난 여러 투쟁들은 표면적 명분과 실제 목적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이 투쟁들은 궁극적으로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마오쩌둥의 개인적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삼반오반 운동 (三反五反运动)
- 표면적 명분: 신생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정부 관료들의 부패, 낭비, 관료주의를 척결하고, 자본가들의 뇌물, 탈세, 국가 재산 횡령 등의 불법 행위를 단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실제 목적: 한국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권력에 협조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제거하여 경제권을 장악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는 공산당이 민간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는 첫 단계였습니다.
반우파 투쟁 (反右派斗争)
- 표면적 명분: '백화제방(百花齐放)' 정책에 따라 공산당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해놓고, 비판에 참여한 사람들을 **'우파'**로 규정하고 숙청했습니다.
- 실제 목적: 대약진 운동을 앞두고 자신들의 정책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침묵시키고,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 자체를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으로 수십만 명의 지식인이 숙청되거나 강제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 표면적 명분: 부르주아적 요소와 전통문화를 타파하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문화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포장되었습니다.
- 실제 목적: 대약진 운동 실패로 권력이 약해진 마오쩌둥이 권력을 되찾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당내 실권자들(특히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 투쟁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젊은 홍위병들을 동원해 기존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은유나 과장이 아닌, 중국 현대사에서 실제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
삼반오반 운동, 반우파 투쟁,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정치적 숙청을 넘어, 중국의 지식인 사회 자체를 뿌리째 뒤흔들고 파괴한 일련의 과정입니다. 이 운동들은 지식인들을 억압하고 침묵시켜, 비판적 사고나 독립적인 의견이 설 자리를 없애버렸습니다.
- 삼반오반 운동: 자본가와 함께 비판적 지식인들을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며 숙청하는 시작점 역할을 했습니다.
- 반우파 투쟁: 공산당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제시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을 '우파'로 몰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거나 사회적으로 매장시켰습니다. 수십만 명의 지식인들이 이 과정에서 희생되었습니다.
- 문화대혁명: 이전에 제거되지 않았던 '부르주아적' 지식인들을 척결하는 광기 어린 대규모 숙청이었습니다. 교수, 교사, 작가, 예술가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고, 구타당하고, 심지어 살해당하거나 자살을 택했습니다.
천안문 사태는 1980년대 후반에 잠시 고개를 들었던 지식인들의 민주화 요구를 탱크와 무력으로 진압하며 다시 한번 정치적 자유와 비판적 목소리가 중국 공산당 체제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중국 지식인 사회는 단절되고, 황폐화되었으며, 침묵을 강요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외부로 망명하거나, 극도로 자기 검열하며 활동하는 현실은 이러한 잔혹한 역사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막음'
개인의 자유로운 발언과 비판적 사고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신호였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체제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어떤 목소리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과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 정치적 목적을 위한 희생양: 처음에는 반혁명 세력, 부르주아, 우파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숙청했지만, 결국은 마오쩌둥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 지식의 단절: 비판적 지식인들을 제거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비판적 사유가 사라지고, 당의 일방적인 지시와 선동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회 발전에 필수적인 건강한 토론과 혁신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공포의 유산: 이러한 잔혹한 역사는 오늘날까지 중국 사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적 논평이나 비판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며, 자기 검열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몇몇 사람을 처벌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비판 정신과 자유로운 사상 자체를 거세하려는 의도였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입막음'이라는 표현이 이 사건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선택의 여지 없는 자살'
당시 지식인들이 처했던 극단적인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 극심한 모욕과 폭력: 이들은 '반동 학술 권위자'나 '지주 계급의 자식' 등으로 비난받으며 대중 앞에서 심한 구타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 가족과 동료의 배신: 홍위병이 된 자녀들이 부모를 비판하고, 동료들이 서로를 고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은 정신적 고통을 극에 달하게 만들었습니다.
- 절망적인 미래: 모든 재산과 명예를 잃고, 자신의 학문과 사상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당장 죽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이미 죽은 존재나 다름없었고, 가혹한 노동과 감시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은 더 이상 생을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마저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지막 저항이거나, 혹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살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폭력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로 평가됩니다.
'10년 동란(十年动乱)'
문화대혁명의 본질은 바로 예측 불가능한 공포와 끝없는 불신이었습니다.
-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포: 마오쩌둥이 언제까지 권력을 쥐고 있을지, 또 어떤 새로운 투쟁이 시작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지식인들은 언제 '반동'으로 낙인찍혀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 일상화된 폭력과 비인간화: 대중에게는 '반혁명 분자'를 구타하고 모욕하는 것이 애국적인 행동으로 장려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성이 파괴되었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고발자가 되는 비극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 사회적 불신의 극대화: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부부가 서로를 고발하는 일이 허용되면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망이 무너졌습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환경은 사람들을 극단적인 고립과 절망으로 내몰았습니다.
이 모든 고통이 무려 10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이 문화대혁명을 더욱 끔찍하게 만듭니다.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살아남는 동안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많은 이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0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 즉 희망 없는 기다림과 끝없이 이어지는 절망의 상황을 비유하는 연극이 있다면, 그 연극은 문화대혁명 시기 지식인들의 고통을 매우 깊이 있게 담아낸 것일 수 있습니다.
- 기약 없는 기다림: 그들은 마오쩌둥의 죽음, 혹은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날을 알지 못했습니다. 매일 고통받으면서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살았지만, 그 기다림은 끝없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은 결국 그 기다림을 포기했습니다.
- 고립된 공간: 버스 정류장이라는 공간은 사회 전체로부터 고립되어 외부와 단절된 지식인들의 상황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외부의 소식도, 희망도, 도움도 없는 절망적인 장소였을 것입니다.
- 무의미한 행동의 반복: 10년간 버스를 기다리는 행위는 매일 반복되는 모욕과 고통 속에서 의미 없는 삶을 이어가야 했던 지식인들의 무기력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중국의 극작가 **사예신(沙叶新)**의 희곡 车站.
이 연극은 말씀하신 대로, 문화대혁명 시기의 비극을 버스 정류장에서 끝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은유적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은유적 의미 분석
- 10년 동안 오지 않는 버스: 여기서 버스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기회, 희망, 혹은 기다리던 변화를 상징합니다. 문화대혁명이 지속된 10년 동안 수많은 지식인과 민간인들이 사회적 혼란과 고통 속에서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끝나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살았지만, 그 기다림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 버스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 이들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각자의 삶이 멈춰버린 중국의 지식인들과 일반인들을 대변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경쟁하며, 때로는 희망을 공유하지만 결국 모두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 무의미한 기다림의 반복: 버스는 오지 않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정류장에 머뭅니다. 이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희망 없이 반복되는 폭력과 감시, 그리고 끝없는 자기 검열 속에서 무력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사예신의 이 작품은 단순한 정치적 풍자를 넘어,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겪는 절망과 고독, 그리고 희망의 상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970년대 말,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에 발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당시 중국인들의 상실감과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사예신(沙叶新)의 희곡 제목은 《车站 버스정류장》(Chēzhàn) 입니다.
이는 단순히 '버스 정류장'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넘어,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인들이 겪었던 끝없는 기다림과 무력감을 상징하는 제목입니다. 10년간의 혼란 속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멈춰버린 삶의 모습을 '정류장'이라는 한 단어로 응축하고 있죠.
이 작품은 희극적인 요소를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깔린 깊은 비극성과 사회 비판으로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车站》은 1980년대 초반,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에 발표된 작품이기에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대단히 용기 있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그것조차 금지였습니다.
1981년, 《车站》은 중국 내에서 공개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 작품이 사회주의 현실을 비판하고 희망을 잃게 한다는 이유로 공연을 금지하고 작가인 사예신을 비판했습니다. 이는 문화대혁명이 끝났다고 해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여전히 용납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车站 버스정류장》이 금지된 이유
- 희망의 부재: 연극은 결국 버스가 오지 않는 것으로 끝나며, 이는 당이 약속한 '사회주의 현대화'에 대한 의구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었음.
- 불안정한 현실 묘사: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야기하며 체제의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이는 사회 혼란을 선동할 수 있다는 당국의 우려를 샀음.
결국 《车站 버스정류장》은 잠시나마 열렸던 표현의 자유가 다시 닫히는 계기가 되었음
문화대혁명은 끝났지만, '입막음'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
一、“一打三反”运动的实质
大家好,欢迎大家收听《纵横大历史》,我是主持人孙诚。 (Dàjiā hǎo, huānyíng dàjiā shōutīng "Zònghéng Dà Lìshǐ", wǒ shì zhǔchírén Sūn Chéng.) 여러분, 안녕하세요. 《종횡대역사》를 청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진행자 쑨청입니다.
今天,我们将继续进行文革历史系列节目。 (Jīntiān, wǒmen jiāng jìxù jìnxíng wéngé lìshǐ xìliè jiémù.) 오늘, 저희는 계속해서 문화대혁명 역사 시리즈 방송을 이어가겠습니다.
在上一讲当中,我们谈到了“清理阶级队伍”运动的血腥残酷。 (Zài shàng yī jiǎng dāngzhōng, wǒmen tándàole “qīnglǐ jiējí duìwǔ” yùndòng de xuèxīng cánkù.) 지난 시간에는 ‘계급 대오 숙청’ 운동의 피비린내 나는 잔혹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在今天这一讲,我们则要谈一谈另外两次大规模镇压运动,也就是“一打三反”和“清查五一六”。 (Zài jīntiān zhè yī jiǎng, wǒmen zé yào tányī tán lìngwài liǎng cì dàguīmó zhèn yā yùndòng, yě jiùshì “yī dǎ sān fǎn” hé “qīngchá wǔyīliù”.) 오늘 이 시간에는 또 다른 두 차례의 대규모 탄압 운동, 즉 ‘일타삼반’과 ‘오일육 심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1970年1月31日,经过毛泽东的同意,中共中央发出了周恩来主持起草的文件《关于打击反革命破坏活动的指示》。 (1970 nián 1 yuè 31 rì, jīngguò máozédōng de tóngyì, zhōnggòng zhōngyāng fāchūle zhōuēnlái zhǔchí qǐcǎo de wénjiàn "Guānyú dǎjí fǎn gémìng pòhuài huódòng de zhǐshì".) 1970년 1월 31일, 마오쩌둥의 동의를 거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저우언라이가 초안을 작성한 문서, 《반혁명 파괴 활동 타격에 관한 지시》를 발표했습니다.
2月5日,中共中央又发出了《关于反对铺张浪费的通知》和《关于反对贪污盗窃、投机倒把的指示》。 (2 yuè 5 rì, zhōnggòng zhōngyāng yòu fāchūle "Guānyú fǎnduì pūzhāng làngfèi de tōngzhī" hé "Guānyú fǎnduì tāngwū dàojiè, tōujī dǎobǎ de zhǐshì".) 2월 5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다시 《사치와 낭비 반대에 관한 통지》와 《탐오 절도 및 투기 행위 반대에 관한 지시》를 발표했습니다.
以上三份文件合在一起,从而构成了一场名为“一打三反”的运动。 (Yǐshàng sān fèn wénjiàn hé zài yīqǐ, cóng'ér gòuchéngle yī chǎng míngwéi “yī dǎ sān fǎn” de yùndòng.) 이 세 가지 문서가 합쳐져 ‘일타삼반’이라 불리는 하나의 운동을 형성했습니다.
值得注意的是,这场运动当中所说的“反对铺张浪费”、“反对贪污盗窃”、“反对投机倒把”实际上都是虚,所谓“打击反革命破坏活动”才是实。 (Zhídé zhùyì de shì, zhè chǎng yùndòng dāngzhōng suǒshuō de “fǎnduì pūzhāng làngfèi”, “fǎnduì tāngwū dàojiè”, “fǎnduì tōujī dǎobǎ” shíji shang dōu shì xū, suǒwèi “dǎjí fǎn gémìng pòhuài huódòng” cái shì shí.)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운동에서 말하는 ‘사치와 낭비 반대’, ‘탐오와 절도 반대’, ‘투기 행위 반대’는 사실 모두 허울이었고, 이른바 ‘반혁명 파괴 활동 타격’이야말로 실질적인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死于这场大屠杀的人,大都是被贴上了所谓“叛徒”、“特务”、“反革命”标签的人,针对的对象则主要是有政治思想的思想犯。 (Sǐ yú zhè chǎng dà túshā de rén, dàdū shì bèi tiēshàngle suǒwèi “pàntú”, “tèwù”, “fǎn gémìng” biāoqiān de rén, zhēnduì de duìxiàng zé zhǔyào shì yǒu zhèngzhì sīxiǎng de sīxiǎng fàn.) 이 대학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반역자’, ‘간첩’, ‘반혁명분자’라는 딱지가 붙은 사람들이었으며, 주요 대상은 정치적 사상이 있는 사상범들이었습니다.
在这场大规模镇压中,约有15万—20万人被杀害,遭到政治迫害的人数更是达到了约200万人之多。 (Zài zhè chǎng dàguīmó zhènyā zhōng, yuē yǒu 15 wàn — 20 wàn rén bèi shāhài, zāodào zhèngzhì pòhài de rénshù gēng shì dádàole yuē 200 wàn rén zhī duō.) 이 대규모 탄압으로 약 15만에서 20만 명이 살해당했으며, 정치적 박해를 받은 사람의 수는 무려 약 200만 명에 달했습니다.
“一打三反”运动在屠杀的规模上虽然不如“清理阶级队伍”运动,但也十分之恐怖。 (“Yī dǎ sān fǎn” yùndòng zài túshā de guīmó shang suīrán bùrú “qīnglǐ jiējí duìwǔ” yùndòng, dàn yě shífēn zhī kǒngbù.) ‘일타삼반’ 운동은 대학살 규모에서 ‘계급 대오 숙청’ 운동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매우 끔찍했습니다.
“清理阶级队伍”运动在更大的程度上,可以说是1966年5月到1968年7月间“两年文革”的一种延续,屠杀的主要对象包括所谓的“黑五类”,以及各地惨遭镇压的造反派,这场运动使“两年文革”后的新社会秩序在大量尸骨上建立了起来。 (“Qīnglǐ jiējí duìwǔ” yùndòng zài gèngdà de chéngdù shang, kěyǐ shuō shì 1966 nián 5 yuè dào 1968 nián 7 yuè jiān “liǎng nián wéngé” de yī zhǒng yánxù, túshā de zhǔyào duìxiàng bāokuò suǒwèi de “hēi wǔ lèi”, yǐjí gèdì cǎnzāo zhènyā de zàofǎn pài, zhè chǎng yùndòng shǐ “liǎng nián wéngé” hòu de xīn shèhuì zhìxù zài dàliàng shīgǔ shang jiànlìle qǐlái.) ‘계급 대오 숙청’ 운동은 더 큰 차원에서 1966년 5월부터 1968년 7월까지의 ‘2년간의 문혁’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학살의 주요 대상에는 이른바 ‘흑오류’와 각지에서 참혹한 탄압을 받은 반대파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2년간의 문혁’ 이후 새로운 사회 질서가 수많은 시신 위에 세워지게 했습니다.
“一打三反”运动,则可以说是一场在这种新社会秩序建立起来以后,展开的大规模所谓“杀人立威”。 (“Yī dǎ sān fǎn” yùndòng, zé kěyǐ shuō shì yī chǎng zài zhè zhǒng xīn shèhuì zhìxù jiànlì qǐlái yǐhòu, zhǎnkāi de dàguīmó suǒwèi “shārén lìwēi”.) 반면 ‘일타삼반’ 운동은 이러한 새로운 사회 질서가 확립된 이후 전개된, 이른바 ‘살인으로 위세를 떨치는’ 대규모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在1970年1月31日周恩来起草的那份通知中,就有这样一句杀气腾腾的话:“对于那些气焰嚣张,罪恶累累、民愤极大、不杀不足以平民愤的反革命分子,要坚决杀掉。” (Zài 1970 nián 1 yuè 31 rì zhōuēnlái qǐcǎo de nà fèn tōngzhī zhōng, jiù yǒu zhèyàng yī jù shāqì téngténg de huà: “Duìyú nàxiē qìyàn xiāozhāng, zuì'è lěilěi, mínfèn jí dà, bù shā bùzú yǐ píng mínfèn de fǎn gémìng fēnzǐ, yào jiānjué shā diào.”) 1970년 1월 31일 저우언라이가 초안을 작성한 그 통지문에는 다음과 같은 살벌한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죄악이 누적되어 백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죽이지 않으면 민심을 진정시키기에 부족한 반혁명분자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于是,随着“一打三反”运动的爆发,又一场人头滚滚的大屠杀拉开了序幕。 (Yúshì, suízhe “yī dǎ sān fǎn” yùndòng de bàofā, yòu yī chǎng réntóu gǔngǔn de dà túshā lākāile xùmù.) 그리하여 ‘일타삼반’ 운동의 발발과 함께 또 한 차례의 피가 낭자한 대학살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这场运动和“清理阶级队伍”一样,也是遍及了中共治下的各地,带来了又一场腥风血雨。 (Zhè chǎng yùndòng hé “qīnglǐ jiējí duìwǔ” yīyàng, yěshì biànjíle zhōnggòng zhì xià de gèdì, dàiláile yòu yī chǎng xīngfēngxuèyǔ.) 이 운동은 ‘계급 대오 숙청’ 운동과 마찬가지로 공산당 통치하의 각지에 퍼져 또 한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폭풍을 불러왔습니다.
二、大量思想者惨遭杀害
在北京市区,“一打三反”运动持续到了1970年底,公开数字显示在这场运动在当地一共所谓“捕获”了约5775名“叛徒、特务、反革命分子以及其他坏分子”,“破获“约3138件”反革命和比较重大的刑事犯罪案件“,发现了 6200 多起贪污盗窃和投机倒把的行为。 (Zài Běijīng shìqū, “yī dǎ sān fǎn” yùndòng chíxù dàole 1970 niándǐ, gōngkāi shùzì xiǎnshì zài zhè chǎng yùndòng zài dāngdì yīgòng suǒwèi “bǔhuò”le yuē 5775 míng “pàntú, tèwù, fǎn gémìng fēnzǐ yǐjí qítā huài fēnzǐ”, “pòhuò”yuē 3138 jiàn “fǎn gémìng hé bǐjiào zhòngdà de xíngshì fànzuì ànjiàn”, fāxiànle 6200 duō qǐ tāngwū dàojiè hé tōujī dǎobǎ de xíngwéi.) 베이징 시내에서는 ‘일타삼반’ 운동이 1970년 말까지 이어졌는데, 공개된 수치에 따르면 이 운동으로 베이징에서 총 약 5,775명의 이른바 ‘반역자, 간첩, 반혁명분자 및 기타 불량분자’를 ‘체포’했고, 약 3,138건의 ‘반혁명 및 비교적 중대한 형사 범죄 사건’을 ‘적발’했으며, 6,200건 이상의 탐오 절도 및 투기 행위를 발견했습니다.
其中,有相当数量的人遭到杀害,其中包括非常著名的文革思想犯遇罗克。 (Qízhōng, yǒu xiāngdāng shùliàng de rén zāodào shāhài, qízhōng bāokuò fēicháng zhùmíng de wéngé sīxiǎng fàn Yù Luōkè.) 그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 그중에는 매우 유명한 문화대혁명 사상범인 위뤄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在文革初期,当时是北京机器厂学徒工的遇罗克曾写过一篇名为《出身论》的文章,反对老红卫兵的“血统论”,强调个人通过努力获得权利。 (Zài wéngé chūqí, dāngshí shì Běijīng jīqì chǎng xuétú gōng de Yù Luōkè céng xiěguò yī piān míngwéi "Chūshēnlùn" de wénzhāng, fǎnduì lǎo hóngwèibīng de “xuètǒnglùn”, qiángdiào gèrén tōngguò nǔlì huòdé quánlì.) 문화대혁명 초기, 당시 베이징 기계 공장 견습공이었던 위뤄커는 《출신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구 홍위병들의 ‘혈통론’에 반대하고, 개인이 노력을 통해 권리를 얻는다고 강조했습니다.
他的这种观点,实际上不但在激烈反对着所谓“老子英雄儿好汉,老子反动儿混蛋”的老红卫兵,也在反对着主张将人划为“红五类”、“黑五类”等不同类别的毛派,这使他遭到了中共各派的一致迫害。 (Tā de zhè zhǒng guāndiǎn, shíjì shang bùdàn zài jīliè fǎnduìzhe suǒwèi “lǎozi yīngxióng ér hǎohàn, lǎozi fǎndòng ér húndàn” de lǎo hóngwèibīng, yě zài fǎnduìzhe zhǔzhāng jiāng rén huà wéi “hóng wǔ lèi”, “hēi wǔ lèi” děng bùtóng lèibié de máo pài, zhè shǐ tā zāodàole zhōnggòng gè pài de yīzhì pòhài.) 그의 이러한 견해는 실제로 이른바 ‘아비가 영웅이면 자식이 호걸이고, 아비가 반동이면 자식이 개자식이다’라는 구 홍위병들에게 격렬하게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홍오류’, ‘흑오류’ 등 다른 부류로 나누는 것을 주장하는 마오쩌둥파에게도 반대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중국 공산당 각 파의 일치된 박해를 받았습니다.
1970年3月5日,时年仅仅27岁的遇罗克,在北京工人体育场的十万人宣判大会上,被身挂大牌子,“宣判死刑,立即执行”,惨遭枪杀。 (1970 nián 3 yuè 5 rì, shí nián jǐnjǐn 27 suì de Yù Luōkè, zài Běijīng gōngrén tǐyùchǎng de shí wàn rén xuānpàn dàhuì shang, bèi shēn guà dàpáizi, “xuānpàn sǐxíng, lìjí zhíxíng”, cǎnzāo qiāngshā.) 1970년 3월 5일, 당시 겨우 27세였던 위뤄커는 베이징 공인체육장 10만 명의 선고 대회에서 큰 팻말을 몸에 매달고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집행한다’는 선고를 받으며 참혹하게 총살당했습니다.
他可以说是“一打三反”运动中遇害思想犯的一个典型代表。 (Tā kěyǐ shuō shì “yī dǎ sān fǎn” yùndòng zhōng yùhài sīxiǎng fàn de yīgè diǎnxíng dàibiǎo.) 그는 ‘일타삼반’ 운동에서 희생된 사상범의 전형적인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在北京之外,“一打三反”运动往往进行的时间要更长,一直到1972、1973年间,中共中央才收到了这场运动所谓“胜利结束”的相关报告。 (Zài Běijīng zhī wài, “yī dǎ sān fǎn” yùndòng wǎngwǎng jìnxíng de shíjiān yào gèng cháng, yīzhí dàole 1972, 1973 nián jiān, zhōnggòng zhōngyāng cái shōudàole zhè chǎng yùndòng suǒwèi “shènglì jiéshù” de xiāngguān bàogào.) 베이징 외의 지역에서는 ‘일타삼반’ 운동이 종종 더 오랜 기간 진행되었으며, 1972년, 1973년에 이르러서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 운동이 이른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는 관련 보고를 받았습니다.
在这场运动中,中共中央将原本属于最高法院的死刑审核权下放到了省一级,有些省又进一步下放到了县一级,被判死刑的人都像遇罗克那样被“立即执行”。 (Zài zhè chǎng yùndòng zhōng, zhōnggòng zhōngyāng jiāng yuánběn shǔyú zuìgāo fǎyuàn de sǐxíng shěnhé quán xiàfàng dàole shěng yī jí, yǒuxiē shěng yòu jìnyībù xiàfàng dàole xiàn yī jí, bèi pàn sǐxíng de rén dōu xiàng Yù Luōkè nàyàng bèi “lìjí zhíxíng”.) 이 운동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원래 최고법원에 속했던 사형 심사 권한을 성(省)급으로 이양했고, 일부 성은 다시 현(縣)급으로까지 내려보냈으며,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위뤄커처럼 ‘즉시 집행’되었습니다.
于是,在这种死刑审核权下放、死刑立即执行的恐怖氛围下,大规模处决、增加处决数字就成了达成运动指标的一种方法,从而造成了大规模的杀戮。 (Yúshì, zài zhè zhǒng sǐxíng shěnhé quán xiàfàng, sǐxíng lìjí zhíxíng de kǒngbù fēnwéi xià, dàguīmó chǔjué, zēngjiā chǔjué shùzì jiù chéngle dáchéng yùndòng zhǐbiāo de yī zhǒng fāngfǎ, cóng'ér zàochéngle dàguīmó de shālù.) 그리하여 이러한 사형 심사 권한 위임과 사형 즉시 집행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대규모 처형과 처형 수치 늘리기는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되었고, 이로 인해 대규모 학살이 초래되었습니다.
南京的一位“一打三反”大屠杀幸存者方子奋,曾用他自己的亲身经历,讲述了这场运动当中的恐怖:(Nánjīng de yī wèi “yī dǎ sān fǎn” dàtúshā xìngcún zhě fāngzǐfèn, céng yòng tā zìjǐ de qīnshēn jīnglì, jiǎngshùle zhè chǎng yùndòng dāngzhōng de kǒngbù:) 난징의 ‘일타삼반’ 대학살 생존자인 팡쯔펀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 운동의 끔찍함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在公判大会主席台上,当主持人宣读死刑判决后,我记得身旁那11位被绑得面孔紫黑的受难者们脸上的那种愤懑、痛苦、恐惧、无奈、绝望的神色; (“Zài gōngpàn dàhuì zhǔxítái shang, dāng zhǔchírén xuāndú sǐxíng pànjué hòu, wǒ jìde shēnpáng nà 11 wèi bèi bǎng dé miànkǒng zǐhēi de shòunàn zhěmen liǎn shang de nà zhǒng fènmèn, tòngkǔ, kǒngjù, wúnài, juéwàng de shénsè;) “공개 선고 대회 주석 단상에서, 진행자가 사형 판결을 낭독한 후, 저는 제 옆에 묶여 얼굴이 검푸르게 변한 그 11명의 희생자들 얼굴에 드러난 분노, 고통, 공포, 무력감, 절망의 기색을 기억합니다.
“从主席台押往刑车停放处的通道上,受难者们因为捆绑过紧、难以呼吸而发出的那种不忍卒听的呻吟,那已经不属于人的声音,完全是一种动物被宰杀前从喉咙里挤出的凄惨低嚎; (“Cóng zhǔxítái yā wǎng xíngchē tíngfàngchù de tōngdào shang, shòunàn zhěmen yīnwèi kǔnbǎng guò jǐn, nányǐ hūxī ér fāchū de nà zhǒng bùrěn zú tīng de shēnyín, nà yǐjīng bù shǔyú rén de shēngyīn, wánquán shì yī zhǒng dòngwù bèi zǎishā qián cóng hóulóng lǐ jǐ chū de qīcǎn dīháo;) “주석 단상에서 형 집행 차량이 세워진 곳까지 이어지는 통로에서, 너무 세게 묶여 숨쉬기 힘든 희생자들이 냈던 차마 들을 수 없는 신음 소리는 더 이상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고, 도살당하기 전 동물의 목에서 쥐어짜내는 처절한 울부짖음 같았습니다.
“刑车缓缓行进的游街示众途中,街道上空回荡的那凄厉的警笛,正在向整个城市倾泄恐怖,正在折磨每一个听者的神经; (“Xíngchē huǎnhuǎn xíngjìn de yóujiē shìzhòng túzhōng, jiēdào shang kōng huídàng de nà qīlì de jǐngdí, zhèngzài xiàng zhěnggè chéngshì qīngxiè kǒngbù, zhèngzài zhémó měi yīgè tīngzhě de shénjīng;) “형 집행 차량이 천천히 시내를 돌며 공개될 때, 거리 위로 울려 퍼지던 그 날카로운 경적 소리는 온 도시에 공포를 쏟아붓고 있었고, 듣는 모든 이들의 신경을 괴롭혔습니다.
“那插入受难者颈背高高竖起的11支白色亡命标牌,随着车辆的颠簸在轻轻摇曳,就像地狱中伸出来的天线一样,它们正在向人世空间发射死亡的信息; (“Nà chārù shòunàn zhě jǐngbèi gāogāo shùqǐ de 11 zhī báisè wángmìng biāopái, suízhe chēliàng de diānbǒ zài qīngqīng yáoyè, jiù xiàng dìyù zhōng shēnchūlái de tiānxiàn yīyàng, tāmen zhèngzài xiàng rénshì kōngjiān fāshè sǐwáng de xìnxī;) “희생자들의 목덜미에 높이 꽂혀 있던 11개의 하얀 사형 팻말은 차량의 흔들림에 따라 살랑거렸는데, 마치 지옥에서 뻗어 나온 안테나처럼 인간 세상에 죽음의 메시지를 발사하고 있었습니다.
“沿途密密麻麻人群脸上那种混合着惊悸、恐怖、疑虑的神情,刑车经过之处人群中发出的那种由惊呼、叹息、窃窃私语汇成的低频声浪……” (“Yántú mìmìmámá rénqún liǎn shang nà zhǒng hùnhézhe jīngjì, kǒngbù, yílǜ de shénqíng, xíngchē jīngguò zhī chù rénqún zhōng fāchū de nà zhǒng yóu jīnghū, tànxī, qièqiè sīyǔ huìchéng de dīpín shēnglàng…”) “길가에 빼곡한 사람들 얼굴에는 경악, 공포, 의심이 뒤섞인 표정이 있었고, 형 집행 차량이 지나간 곳에서 군중이 내뱉은 경악, 탄식, 속삭임이 모여 저음의 파동을 이루었습니다...”
三、“无厘头”的“清查五一六”
另一场运动“清查五一六”,它的源头则是显得非常之“无厘头”。 (Lìng yī chǎng yùndòng “qīngchá wǔyīliù”, tā de yuántóu zé shì xiǎndé fēicháng zhī “wúlítóu”.) 또 다른 운동인 ‘오일육 심사’의 근원은 매우 ‘터무니없이’ 보입니다.
这场运动的起源,要追溯到1967年夏天。 (Zhè chǎng yùndòng de qǐyuán, yào zhuīsù dào 1967 nián xiàtiān.) 이 운동의 기원은 1967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当时,文革正在进入它的第二个激进高潮,周恩来也成为了一部分造反派的攻击对象。 (Dāngshí, wéngé zhèngzài jìnrù tā de dì èr gè jījiàn gāocháo, zhōuēnlái yě chéngwéile yī bùfèn zàofǎn pài de gōngjí duìxiàng.) 당시 문화대혁명은 두 번째 격렬한 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고, 저우언라이도 일부 반대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1967年5月底,北京钢铁学院学生张建旗等人成立了造反派组织“五·一六兵团”。 (1967 nián 5 yuèdǐ, Běijīng gāngtiě xuéyuàn xuéshēng Zhāng Jiànqí děng rén chénglìle zàofǎn pài zǔzhī “wǔ·yīliù bīngtuán”.) 1967년 5월 말, 베이징강철학원 학생 장젠치(张建旗) 등은 ‘오일육 병단’이라는 반대파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6月2日,张建旗贴出了一封题为《给周总理的一封公开信》的大字报,一连提出了质问周恩来的二十三个问题。 (6 yuè 2 rì, Zhāng Jiànqí tiē chūle yī fēng tíwéi "Gěi Zhōu zǒnglǐ de yī fēng gōngkāixìn" de dàzìbào, yīlián tíchūle zhìwèn zhōuēnlái de èrshísāngè wèntí.) 6월 2일, 장젠치는 《저우 총리께 보내는 공개 서한》이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저우언라이에게 23가지 질문을 연속으로 던졌습니다.
6月30日至7月1日,一批反对周恩来的各校造反派学生组成了规模更大的反周组织“首都五·一六红卫兵团”,在北京外语学院召开第一届代表大会。 (6 yuè 30 rì zhì 7 yuè 1 rì, yī pī fǎnduì zhōuēnlái de gèxiào zàofǎn pài xuéshēng zǔchéngle guīmó gèng dà de fǎn zhōu zǔzhī “shǒudū wǔ·yīliù hóngwèibīng tuán”, zài Běijīng wàiyǔ xuéyuàn zhàokāi dì yī jiè dàibiǎo dàhuì.) 6월 30일부터 7월 1일까지, 저우언라이에 반대하는 여러 학교의 반대파 학생들이 더 큰 규모의 반(反)저우 조직인 ‘수도 오일육 홍위병단’을 결성하고, 베이징외국어학원에서 제1차 대표대회를 개최했습니다.
在这之后,这些反周的“五·一六兵团”小将们将行动升级,于1967年8月8日、9日在北京各地广泛发放传单,表示“周恩来的要害是背叛五一六通知”、“周恩来是无产阶级文化大革命的叛徒”,北京也出现了攻击周恩来的大字报和标语。 (Zài zhè zhīhòu, zhèxiē fǎn zhōu de “wǔ·yīliù bīngtuán” xiǎojiàngmen jiāng xíngdòng shēngjí, yú 1967 nián 8 yuè 8 rì, 9 rì zài Běijīng gèdì guǎngfàn fāfàng chuándān, biǎoshì “zhōuēnlái de yàohài shì bèipàn wǔyīliù tōngzhī”, “zhōuēnlái shì wúchǎnjiējí wénhuà dàgémìng de pàntú”, Běijīng yě chūxiànle gōngjí zhōuēnlái de dàzìbào hé biāoyǔ.) 이후, 이 반저우 성향의 ‘오일육 병단’의 어린 장수들은 행동을 격상시켜, 1967년 8월 8일과 9일에 베이징 각지에서 전단을 광범위하게 배포하며 “저우언라이의 핵심 문제는 오일육 통지를 배신한 것”이며, “저우언라이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반역자”라고 주장했고, 베이징에도 저우언라이를 공격하는 대자보와 구호가 등장했습니다.
在当时的第二次文革高潮中,周恩来虽被攻击,但没有被打倒。 (Zài dāngshí de dì èr cì wéngé gāocháo zhōng, zhōuēnlái suī bèi gōngjí, dàn méiyǒu bèi dǎdǎo.) 당시 두 번째 문화대혁명 절정기에서 저우언라이는 공격을 받았지만, 몰락하지는 않았습니다.
随着这次文革高潮的降温,五一六兵团的骨干也很快就遭到了逮捕。 (Suízhe zhè cì wéngé gāocháo de jiàngwēn, wǔyīliù bīngtuán de gǔgàn yě hěn kuài jiù zāodàole dàibǔ.) 이 문화대혁명 절정기가 가라앉으면서, 오일육 병단의 핵심 인물들도 곧 체포되었습니다.
本来,这件事看上去已经是结束了。 (Běnlái, zhè jiàn shì kàn shangqù yǐjīng shì jiéshùle.) 원래 이 일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然而,在1969年,这件事情又被中共高层提了出来。 (Rán'ér, zài 1969 nián, zhè jiàn shìqíng yòu bèi zhōnggòng gāocéng tíchūle lái.) 하지만 1969년에 이 사건은 다시 중국 공산당 고위층에 의해 거론되었습니다.
在这一年的一天里,毛泽东在有关北师大的一份报告上曾作出这样的批示,说:“北京市就是不抓‘五一六’”。 (Zài zhè yī nián de yī tiān lǐ, máozédōng zài yǒuguān Běishīdà de yī fèn bàogào shang céng zuòchū zhèyàng de pīshì, shuō: “Běijīng shì jiùshì bù zhuā ‘wǔyīliù’”.) 그해 어느 날, 마오쩌둥은 베이징사범대학에 관한 한 보고서에 “베이징시는 바로 ‘오일육’을 잡지 않는다”라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同年6月28日,周恩来在对中国科学院哲学社会科学部的谈话中,这样说道:“‘五·一六‘是利用1967年发表《5.16通知》搞起来的,他们抓的很快,主席抓的更快。 (Tóngnián 6 yuè 28 rì, Zhōuēnlái zài duì zhōngguó kēxuéyuàn zhéxué shèhuì kēxué bù de tánhuà zhōng, zhèyàng shuōdào: “‘wǔ·yīliù’ shì lìyòng 1967 nián fābiǎo "5.16 Tōngzhī" gǎo qǐlái de, tāmen zhuā de hěn kuài, zhǔxí zhuā de gèng kuài.) 같은 해 6월 28일, 저우언라이는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일육’은 1967년에 발표된 《5.16 통지》를 이용해 일어난 것인데, 그들이 잡은 것은 매우 빨랐고 주석(마오쩌둥)이 잡은 것은 더 빨랐습니다.
姚文元9月份发表文章点“五·一六”是反动组织,主席8月份就抓住了,主席看的准…… (Yáo Wényuán 9 yuèfèn fābiǎo wénzhāng diǎn “wǔ·yīliù” shì fǎndòng zǔzhī, zhǔxí 8 yuèfèn jiù zhuāzhùle, zhǔxí kàn de zhǔn…) 야오원위안(姚文元)은 9월에 글을 발표해 ‘오일육’이 반동 조직이라고 지목했는데, 주석(마오쩌둥)은 8월에 이미 알아챘습니다. 주석은 정확히 보셨습니다...
‘五·一六‘串连,小报上都透露了,主席很快就发现了,矛头不对。 (‘Wǔ·yīliù’ chuànlián, xiǎo bào shang dōu tòulùle, zhǔxí hěn kuài jiù fāxiànle, máotóu bùduì.) ‘오일육’의 연합은 작은 신문에서도 모두 드러났고, 주석은 곧바로 발견하셨습니다. 방향이 옳지 않았죠.
原来后台就是王、关、戚。 (Yuánlái hòutái jiùshì Wáng, Guān, Qī.) 원래의 배후는 바로 왕리(王力), 관펑(关锋), 치번위(戚本禹)였습니다.
起头,我们想分化他们,把戚本禹分出来,实际上他们是一伙。” (Qǐtóu, wǒmen xiǎng fēnhuà tāmen, bǎ Qī Běnyǔ fēn chūlái, shíjì shang tāmen shì yī huǒ.”) 처음에 우리는 그들을 분열시키려고 했고, 치번위를 갈라놓으려 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한패였습니다.”
这样,所谓“五一六”就和早已经被打倒的王力、关锋、戚本禹联系了起来。 (Zhèyàng, suǒwèi “wǔyīliù” jiù hé zǎo yǐjīng bèi dǎdǎo de Wáng Lì, Guān Fēng, Qī Běnyǔ liánxìle qǐlái.) 이렇게 해서 이른바 ‘오일육’은 이미 몰락했던 왕리, 관펑, 치번위와 연관되었습니다.
接下来,在1969年8月14日,江青在对一些文艺工作者讲话的时候,又对“五一六”的定性进行了加码,说道:“‘五·一六‘是个反革命组织。 (Jiē xiàlái, zài 1969 nián 8 yuè 14 rì, Jiāng Qīng zài duì yīxiē wényì gōngzuòzhě jiǎnghuà de shíhou, yòu duì “wǔyīliù” de dìngxìng jìnxíngle jiāmǎ, shuōdào: “‘wǔ·yīliù’ shì gè fǎn gémìng zǔzhī.) 이어서 1969년 8월 14일, 장칭(江青)은 일부 예술가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오일육’의 성격을 더욱 강화하며 말했습니다. “‘오일육’은 반혁명 조직입니다.
他们的后台杨、余、傅,还有混进中央文革的坏人王、关、戚。 (Tāmen de hòutái Yáng, Yú, Fù, háiyǒu hùnjìn zhōngyāng wéngé de huàirén Wáng, Guān, Qī.) 그들의 배후는 양청우(杨成武), 위리진(余立金), 푸충비(傅崇碧)이며, 그리고 중앙문혁(中央文革)에 끼어든 나쁜 사람인 왕리, 관펑, 치번위가 있습니다.
这六个人一方面打着人民解放军的旗号;另一方面打着中央文革的招牌,搞形“左”实右,这就难免有人上他们的当。” (Zhè liù gè rén yī fāngmiàn dǎzhe rénmín jiěfàngjūn de qíhào; lìng yī fāngmiàn dǎzhe zhōngyāng wéngé de zhāopái, gǎo xíng “zuǒ” shí yòu, zhè jiù nánmiǎn yǒurén shàng tāmen de dàng.”) 이 여섯 명은 한편으로는 인민해방군의 깃발을 내걸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문혁의 간판을 내세워 ‘형태는 좌파이나 실상은 우파’인 짓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누군가 그들에게 속는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这样,同样早已经被打倒的杨成武、余立金、傅崇碧也被说成了“五一六”的后台。 (Zhèyàng, tóngyàng zǎo yǐjīng bèi dǎdǎo de Yáng Chéngwǔ, Yú Lìjīn, Fù Chóngbì yě bèi shuōchéngle “wǔyīliù” de hòutái.) 이렇게 해서, 마찬가지로 이미 몰락한 양청우, 위리진, 푸충비도 ‘오일육’의 배후라고 지목되었습니다.
另一毛派干将谢富治则在同一场活动中直白地说:“清理阶级队伍不能让敌人漏掉了。 (Lìng yī máo pài gànjiàng Xiè Fùzhì zé zài tóngyī chǎng huódòng zhōng zhíbái de shuō: “Qīnglǐ jiējí duìwǔ bùnéng ràng dírén lòudiàole.) 또 다른 마오쩌둥파의 핵심 인물인 셰푸즈(谢富治)는 같은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말했습니다. “계급 대오를 숙청할 때 적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五·一六‘少数骨干分子是很凶恶的敌人。 (‘wǔ·yīliù’ shǎoshù gǔgàn fēnzǐ shì hěn xiōng'è de dírén.) ‘오일육’의 소수 핵심 분자들은 매우 흉악한 적입니다.
不管在哪方面,我们坚决要和他们斗争。 (Bùguǎn zài nǎ fāngmiàn, wǒmen jiānjué yào hé tāmen dòuzhēng.) 어떤 측면에서든 우리는 그들과 결연히 투쟁해야 합니다.
把‘五·一六‘都揪出来,一个也不能漏。 (Bǎ ‘wǔ·yīliù’ dōu jiūchūlái, yīgè yě bùnéng lòu.) ‘오일육’을 모두 끌어내야 하며,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宣传队绝不能推拖。 ” (Xuānchuánduì jué bùnéng tuītuō. ”) 선전대는 절대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同样出席了这场活动的周恩来则表示:“坚决贯彻江青同志讲话精神,把‘五一六‘搞一搞。” (Tóngyàng chūxíle zhè chǎng huódòng de Zhōuēnlái zé biǎoshì: “Jiānjué guànchè Jiāng Qīng tóngzhì jiǎnghuà jīngshén, bǎ ‘wǔyīliù’ gǎo yī gǎo.”) 같은 행사에 참석했던 저우언라이는 “장칭 동지의 연설 정신을 결연히 관철하여, ‘오일육’을 한 번 잡아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由此可见,所谓“五一六”完全就是一种口袋罪名,实际上针对的主要矛头则是各路已经失势的造反派。(Yóu cǐ kějiàn, suǒwèi “wǔyīliù” wánquán jiùshì yī zhǒng kǒudài zuìmíng, shíjì shang zhēnduì de zhǔyào máotóu zé shì gèlù yǐjīng shīshì de zàofǎn pài.) 이를 통해 볼 때, 이른바 ‘오일육’은 완전히 하나의 주머니 죄명(‘누명’)이었고, 실제로는 이미 몰락한 각계 반대파들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1971年2月28日,中共中央建立了“五·一六专案联合小组”,以吴德、李震为正副组长。 (1971 nián 2 yuè 28 rì, zhōnggòng zhōngyāng jiànlìle “wǔ·yīliù zhuān'àn liánhé xiǎozǔ”, yǐ Wú Dé, Lǐ Zhèn wéi zhèng fù zǔzhǎng.) 1971년 2월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우더(吴德)와 리쩐(李震)을 정, 부조장으로 하는 ‘오일육 특별 공동 조사팀’을 설립했습니다.
根据成立这一专案联合小组的文件规定:“在清查’5·16’反革命阴谋集团的过程中,既要防止扩大化,又不要一风吹,就必须集中力量抓’5·16’反革命阴谋集团的一系列罪行,将它一个一个落实,而不要一开始就笼统地追查组织关系和是否填了表格。” (Gēnjù chénglì zhè yī zhuān'àn liánhé xiǎozǔ de wénjiàn guīdìng: “Zài qīngchá ‘5·16’ fǎn gémìng yīnmóu jítuán de guòchéng zhōng, jì yào fángzhǐ kuòdàhuà, yòu bùyào yī fēng chuī, jiù bìxū jízhōng lìliàng zhuā ‘5·16’ fǎn gémìng yīnmóu jítuán de yī xìliè zuìxíng, jiāng tā yīgè yīgè luòshí, ér bùyào yī kāishǐ jiù lǒngtǒng de zhuīchá zǔzhī guānxì hé shìfǒu tiánle biǎogé.”) 이 특별 공동 조사팀을 설립하는 문서의 규정에 따르면, “‘5·16’ 반혁명 음모 집단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5·16’ 반혁명 음모 집단의 일련의 죄행에 집중하여 하나씩 실체를 파악해야 하며, 처음부터 조직 관계나 서식 작성 여부를 포괄적으로 추궁해서는 안 된다.”
换言之,任何人都可能是所谓的“五一六”,不管这个人实际上在组织上有没有参加过一共就没有多少人的“五·一六”兵团。 (Huàn yán zhī, rènhé rén dōu kěnéng shì suǒwèi de “wǔyīliù”, bùguǎn zhè gè rén shíjì shang zài zǔzhī shang yǒu méiyǒu cānjiāguò yīgòng jiù méiyǒu duōshǎo rén de “wǔ·yīliù” bīngtuán.) 다시 말해, 이른바 ‘오일육’은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조직적으로는 총 인원수가 얼마 되지 않았던 ‘오일육’ 병단에 그 사람이 실제로 참여했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很快,被罗织到了“五一六”头上的罪名,就包括了火烧英国代办处、“揪刘火线”包围中南海、“揪军内一小撮”、1967年5月13日“新三军派”冲击“老三军派”演出、所谓“清华、北航黑会”、清华造反派开枪射击工宣队等等一系列造反派作出的著名事件。 (Hěn kuài, bèi luózhī dàole “wǔyīliù” tóu shang de zuìmíng, jiù bāokuòle huǒshāo yīngguó dàibànchù, “jiū Liú huǒxiàn” bāowéi zhōngnánhǎi, “jiū jūn nèi yī xiǎocuō”, 1967 nián 5 yuè 13 rì “xīn sānjūn pài” chōngjí “lǎo sānjūn pài” yǎnchū, suǒwèi “qīnghuá, běiháng hēi huì”, Qīnghuá zàofǎn pài kāiqiāng shèjí gōngxuānduì děngděng yī xìliè zàofǎn pài zuòchū de zhùmíng shìjiàn.) 얼마 지나지 않아 ‘오일육’이라는 명목으로 날조된 죄명에는 영국 대리 공관 방화, ‘류샤오치 제거 전선’의 중난하이(中南海) 포위, ‘군 내의 소수 무리 제거’, 1967년 5월 13일 ‘신삼군파’가 ‘구삼군파’ 공연을 습격한 사건, 이른바 ‘칭화, 베이항 암흑 회의’, 칭화대 반대파가 공선대(工宣隊)에 총을 쏜 사건 등 반대파들이 벌인 일련의 유명한 사건들이 포함되었습니다.
这些事件当中,有不少曾是蒯大富的手笔,也就是说连蒯大富这时候都成了“五一六”——在这种疯狂的“清查”之下,“五一六”被安上了种种它没做过的事,实在是使人无语至极。 (Zhèxiē shìjiàn dāngzhōng, yǒu bùshǎo céng shì Kuǎi Dàfù de shǒubǐ, yě jiùshì shuō lián Kuǎi Dàfù zhè shíhou dōu chéngle “wǔyīliù” — zài zhè zhǒng fēngkuáng de “qīngchá” zhī xià, “wǔyīliù” bèi ān shangle zhǒngzhǒng tā méi zuòguò de shì, shízài shì shǐ rén wúyǔ zhìjí.) 이 사건들 중에는 상당수가 쿠아이다푸(蒯大富)가 벌인 일이었는데, 이는 즉 쿠아이다푸조차 이때 ‘오일육’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광기 어린 ‘심사’ 속에서 ‘오일육’은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온갖 일들을 뒤집어썼으니, 정말이지 사람을 말문이 막히게 할 정도였습니다.
一直到1974年初,疯狂的“清查五一六”事件才告一段落。 (Yīzhí dàole 1974 niánchū, fēngkuáng de “qīngchá wǔyīliù” shìjiàn cái gào yī duànluò.) 1974년 초가 되어서야 광기 어린 ‘오일육 심사’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在这场运动中,又出现了数以十万计的死者。 (Zài zhè chǎng yùndòng zhōng, yòu chūxiànle shùyǐ shí wàn jì de sǐzhě.) 이 운동에서도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而更为蹊跷的是,这场运动走向终结的一个标志,也和它的开始一样显得十分“无厘头”——1973年10月22日,“五·一六联合专案小组”副组长李震,被人发现死在了中国公安部大院的地下热力管道沟中,后来被中共中央定性为所谓“畏罪自杀”。 (Ér gèng wéi qīqiāo de shì, zhè chǎng yùndòng zǒuxiàng zhōngjié de yīgè biāozhì, yě hé tā de kāishǐ yīyàng xiǎndé shífēn “wúlítóu” — 1973 nián 10 yuè 22 rì, “wǔ·yīliù liánhé zhuān'àn xiǎozǔ” fù zǔzhǎng Lǐ Zhèn, bèi rén fāxiàn sǐ zàile zhōngguó gōng'ānbù dà yuàn de dìxià rèlì guǎndào gōu zhōng, hòulái bèi zhōnggòng zhōngyāng dìngxìng wéi suǒwèi “wèizuì zìshā”.) 더욱 기이한 점은, 이 운동이 종결로 향하는 한 가지 신호 역시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매우 ‘터무니없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1973년 10월 22일, ‘오일육 특별 공동 조사팀’의 부조장 리쩐은 중국 공안부 청사 지하 난방 파이프 도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나중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를 이른바 ‘죄를 두려워한 자살’로 규정했습니다.
然而,如果这不是一起他杀案件的话,很难想象一个人怎么会钻进这种地方。 (Rán'ér, rúguǒ zhè búshì yīqǐ tā shā ànjiàn de huà, hěn nán xiǎngxiàng yīgè rén zěnme huì zuànjìn zhè zhǒng dìfāng.) 그러나 이것이 타살 사건이 아니라면, 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곳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这就不得不引起人们的猜想:中共高层为了结束这场疯狂的运动,将李震作为替罪羊抛了出来。 (Zhè jiù bùdébù yǐnqǐ rénmen de cāixiǎng: zhōnggòng gāocéng wèile jiéshù zhè chǎng fēngkuáng de yùndòng, jiāng Lǐ Zhèn zuòwéi tìzuìyáng pāochūle lái.) 이는 사람들의 추측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게 합니다. 중국 공산당 고위층이 이 광기 어린 운동을 끝내기 위해 리쩐을 희생양으로 내던진 것이라는 추측 말입니다.
感谢大家,这个星期就先讲到这里。 (Gǎnxiè dàjiā, zhè gè xīngqí jiù xiān jiǎng dào zhèl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는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文革系列(130):“一打三反”与“清查五一六”
在“清理阶级队伍”开始后,中共又展开了“清查五一六”和“一打三反”两场政治运动,将屠杀推向了更大的规模。在“一打三反”运动中,有大量思想者被害。至于“清查五一六”运动,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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